▒▒▒▒▒※※☆▒▒/이형권무심재 123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41) 만산계곡에서

만산계곡에서 / 이형권 그대에게 가는 길이 보이지 않네 그믐날 내리는 눈은 잊혀진 마을 어귀에 쌓이고 갈 곳 없는 발길 남녘으로 흘러 화순 지나 능주 지나 도암에 이르렀건만 그대에게 가는 길이 보이지 않네. 해리에서 어둔에서 마락리 고갯길에서 그대가 스치고 간 길을 찾아 얼마나..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8) 시목나루

시목나루 / 이형권 섬진강변 시목나루 바람만 예전처럼 휭휭 지나고 지금은 잊혀진 나루라네 시루봉 능선에서 내려다 보면 물결 속에 출렁이는 산자락을 타고 이슬 맞은 애비들이 강을 넘던 곳 돌아보면 꿈결처럼 강물이 흐르고 쌍무덤 가 소나무 홀로 서 있는 선 떨어진 빨치산이 쓰러..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7) 아버지

아버지 / 이형권 보리밭에 일렁이는 바람이었다가 나락밭에 서걱이는 빗방울이었다가 만대산에 내려앉은 구름이었다가 무지랫봉에 떨어지는 노을이었다가 박둑거니 솔밭 길을 걸어오는 햇살이었다가 둔주포 장터에서 돌아오는 저녁 불빛이었다가 뒤란 대숲 속에 잦아드는 기침소리였..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6) 가을밤

가을밤 / 이형권 어머니 박두거니 서마지기 무논에는 오늘밤도 기러기 떼가 날아오르는지요. 동네 사람들 모두 돌아간 뒤에도 우리 집 논에는 언제나 긴 그림자 부산거리고 기러기 떼는 산 밑에서 바다 쪽으로 날아오르고 있었지요. 팔에다 무명베 토시를 낀 누님이랑 명아주대처럼 취해..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5) 달밤에

달밤에 / 이형권 처음부터 예고된 길은 없습니다. 바람에 흩어진 꽃씨처럼 서로의 영토는 달랐지만 모두가 운명 같은 길을 따라서 흘러갑니다. 푸른 달빛을 받고 날아가는 기러기 떼처럼 허공에 흩어진 그 길을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곳까지 와 있습니다. 돌아보면 얼마나 눈물겨운 길이..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4) 옛 집

옛 집 / 이형권 무너진 흙 담 아래 늙으신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풀곷처럼 흔들리는 곳 긴 겨울밤을 지새우던 쇠죽방 구들장은 무너져 내리고 두레박 속에 메아리를 건져 올리던 우물도 말라 버렸지만 그리운 곳에 옛집이 있다. 뒤란 동백나무 숲 속에서 꽃잎을 줍고 술레가 되어 헤매..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3) 두우리 기행

두우리 기행 / 이형권 그믐께 바다는 신열을 앓으며 속절없이 바윗돌 위레 쓰러진다. 까무러칠 것만 같은 바다의 파열음 술에 취해 떠돌던 염산이나 칠산 부근 슬픈 화인火印을 찍어 주던 불빛처럼 다시 옛 시절의 거처를 떠돌아 본다. 나는 한 세월을 허덕이며 무엇을 찾아 헤매는지 달..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2) 등피 닦던 날

등피 닦던 날 / 이형권 등피를 닦던 날이 있었습니다. 나직이 입김을 불어 그을음을 닦아 내면 허공처럼 투명해져 낯빛이 드러나고 그런 날 밤 어머니의 등불은 먼 곳에서도 금세 찾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믐날 동네 여자들 모두 바다로 가고 물썬 갯펄에는 거미처럼 움직이는 불빛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