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권무심재 123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1) 황산에서

황산에서 / 이형권 쓸쓸하구나 견훤의 무덤이여 이른 새벽 자욱한 안개 속에 가랑잎만이 무수히 쌓여 있고 멀리 연무들에는 장병들의 구령 소리 들려오는데 그대의 산하에는 정적만이 흐르고 뱃구레를 적셔 줄 뜨거운 술 한 잔이 없구나 은진현 남쪽 시오리길 풍계촌 황산불사黃山佛寺..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0) 가을 숲에서

가을 숲에서 / 이형권 가을 숲에서의 사랑은 찰나와 같습니다. 백양나무에 쓴 연서도 자작나무 숲에서의 입맞춤도 미루나무 잎사귀에 머물던 노래도 가을 숲에서는 모두가 찰나와 같습니다. 가을 숲에서도 달이 뜨고 은하수가 흐르고 바람 소리가 스치고 풀벌레가 울지만 모든 것이 불빛..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29) 축서사에서

축서사*에서 / 이형권 그리움으로 서 있구나 옛 석등이여 그대 배후에 깔린 어둠 속에서 다시 하루가 저물어 가고 마음속의 길들이 황무지처럼 헝크러진 날 가랑잎 휘날리는 길모퉁이에 서성이노니 나는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지혜도 얻지 못하였고 불 밝혀 기다릴 사랑 하나 간직하지 못..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28) 도마령刀馬嶺

도마령刀馬嶺 / 이형권 도마령*에 가리라 했다. 사랑했던 날들이 흐르는 물과 같이 가기 전에 도마령에 가리라 했다. 돌아보면 눈물 같은 것 눈부시게 반짝이는 늦가을의 짧은 햇살 같은 것 흐르고 흘러서 낯선 그림자 하나 머물지 않는 메마른 가지 끝에 홀로 타는 저 붉은 낙엽송의 길 ..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27) 잊혀진 정원

잊혀진 정원 / 이형권 어디쯤이었던가. 그대와 내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길이 떨리던 가슴으로 입맞춤을 하던 숲그늘이 어디쯤이었던가. 툇마루 끝에 앉아서 저녁 별을 보다가 파초잎이 떨어지던 빗소리를 듣다가 소슬한 바람결에 마음을 열었던 때가 어디쯤이었던가. 홀로 옛 정원에 ..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25) 제비집

제비집 / 이형권 자식도 떠나고 세상 버린 이녁도 영영 떠나 버리고 늙은 모모 홀로 사는 고향 집에 제비가 집을 지었다. 구만 리 강남 길을 짝을 지어 날아온 제비 간척지 흙을 물어 와 소쿠리 같은 거처를 마련하고 그 속에서 오순도순 알을 낳고 털복숭이 같은 새끼들을 키우더니 밤이 ..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24) 가거도에서

가거도에서 / 이형권 세상의 끝자락에 서 보고 싶은 날들이었습니다. 가없는 하늘가에 노을이 내리고 그 길을 따라서 외딴섬 언덕 위에 길 잃은 나그네가 서 있습니다. 초병들이 지키는 초소 아래에는 저녁 바다의 슬픈 노래가 있고 깊어 가는 바다처럼 사랑했던 날들은 적막하기만 합니..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22) 초승달

초승달/ 이형권 초저녁 하늘빛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강물이 흐르는 작은 창가에는 미루나무 가지 끝을 살랑이는 하늬바람이 불고 산등성이를 서성이는 긴 그림지가 있습니다. 지빠귀 울음소리 까닭 없이 서러운 날에 강물은 푸르게 하늘빛을 닮아 가고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