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권무심재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36) 가을밤

나무향(그린) 2017. 12. 30. 08:16

 

 

가을밤 / 이형권

 

어머니

박두거니 서마지기 무논에는

오늘밤도 기러기 떼가 날아오르는지요.

 

동네 사람들 모두 돌아간 뒤에도

우리 집 논에는 언제나 긴 그림자 부산거리고

기러기 떼는 산 밑에서 바다 쪽으로 날아오르고 있었지요.

 

팔에다 무명베 토시를 낀 누님이랑

명아주대처럼 취해 계시던 아버지랑

긴 논뚝길을 따라 벼 낟가리를 헤아리던 나는

산그늘처럼 어둠 속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았지요.

 

어덩 밑에 풀 뜯던 송아지의 워낭 소리 짤랑 거리고

분둣골 제각에 남폿불이 깜박거릴 때

우리 집 논에는 푸짐하게 내리던 달빛이 있었습니다.

 

제금을 나와 처음으로 장만했다는 서마지기 논에는

논벌보다 깊은 희망이 있었고

신명이 든 나는 줄지어 달리며

벼 낟가리를 몇 번이고 헤아리며 셈을 하였지요.

 

바다에서 산 밑으로 다시 기러기 떼가 날아오르자

긴 한숨을 내쉬던 아버지가

언젠가는 우리도 저 새들처럼

먼 곳으로 날아갈 것이라고 하셨지요.

 

어머니

지금도 서마지기 무논에는 그해처럼

기러기 떼가 날아오르는지요.

 

내 마음 속에는 지금도

무서리가 내리던 그날의 푸르스름한 달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