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산책 ▒/법정스님 280

눈고장에서 또 한 번의 겨울을 나다 - 허균의 시비 앞에서

허균의 시비 앞에서 서쪽 창으로 비쳐드는 오후의 햇살이 아늑하고 정다운 11월. 창밖으로 가랑잎 휘몰아 가는 바람 소리가 내 손등의 살갗처럼 까슬까슬하다. 숲에 빈 가지가 늘어가고 개울가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바빠진다. 아궁이와 난로에 지필 장작을 패서 처마밑에 들이고, 고추밭에 얼어서 ..

(4) 눈고장에서 또 한 번의 겨울을 나다 - 겨울 채비를 하며

겨울 채비를 하며 서리가 내리고 개울가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내 오두막에도 일손이 바빠진다. 캐다가 남긴 고구마를 마저 캐서 들여야 하고, 겨울 동안 난로에 지필 장작을 골라서 추녀 밑에 따로 쌓아야 한다. 장작의 길이가 길면 난로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짧은 걸로 가리고 통으로 된 나..

안으로 귀 기울이기 - 파초잎에 앉아

파초잎에 앉아 휴가철이 되니 다시 길이 막힌다. 산과 바다를 찾아가는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더위를 피해서, 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가를 보내기 위해 모처럼 일상의 집에서 떠나온 길이다. 더위를 피할 곳이 어디이기에 이처럼 동이 트기 전부터 차량의 흐름을 이루는 것일까. 바다와 산..

안으로 귀 기울이기 - 인간의 가슴을 잃지 않는다면

인간의 가슴을 잃지 않는다면 추석을 앞두고 연일 음산한 날씨 때문에 풀을 쑤어 놓고도 미처 창문을 바르지 못했다. 가을날 새로 창을 바르면 창호에 비쳐드는 맑은 햇살로 방 안이 아늑하고 달빛도 한결 푸근하다. 이제 산중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서 날마다 군불을 지펴야 한다. 들녘에 풍년..

안으로 귀 기울이기 - 개울물에 벼루를 씻다

개울물에 벼루를 씻다 비가 내리다가 맑게 갠 날, 개울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벼루를 씻었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들으면서 벼루를 씻고 있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문득 내 안에서 은은한 묵향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이렇듯 말게 흐르는 개울물도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면..

안으로 귀 기울이기 - 가난한 절이 그립다

가난한 절이 그립다 옛 스승은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해야 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반드시 그 뜻을 잃는다. 예전의 출가 수행자는 한 벌 가사와 한 벌 바리때 외에는 아무 것도 지니려고 하지 않았다. 사는 집에 집착하지 않고, 옷이나 음식에도 생각을 두지 않았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