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정에서 / 이형권
가을 산정에 부는 바람은 사랑을 잊었다.
사랑도 그리움도 모두 잊어서 홀연하다.
바람은 우거진 수풀 속에서 불어오기도 하고
산너머 암자의 풍경소리에서 불어오기도 하고
산골짜기 외딴집 굴뚝 끝에서 불어오기도 하지만
가을 산정에 부는 바람은 풍우에 씻겨 빛나는
저 우뚝한 화암의 절벽처럼 무정하다.
햇살과 바람과 푸르게 내려오는 저녁 하늘빛까지
흐느끼며 존재하는 가을 산정의 오후
거기, 가지 못한 길이 있다.
눈부신 억새꽃의 물결 속으로 흐미하게
가지 못한 길이 있어 아프다.
마음은 새털구름 흘러가는 하늘에 닿으려다
못다한 고백처럼 억새밭에 흔들리고
무성했던 날들이 여위어가는 시간
가을 산정은 순정을 바쳐버린 마음처럼 서럽다.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날들이
모가지를 빼고 억새처럼 흐느끼는데
산정에는 애오라지 가냘픈 노래가 흐르고 있다.
산에도 들에도 저무는 낙엽송의 옷자락 위에도
쓸쓸하게 스미는 바람의 노래여
사랑을 잊었다고 하지만
그리움을 잊었다고 하지만
가을 산정에는
머무를 수 없는 길들이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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