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바람 - 서정주
1960년 4월 19일
대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를 습격해 들어가다가
경무대의 발포로
우리 동국대학생 노재두 군도 총 맞아 죽은 날
아침에 그 동국대학생인 내 장남 승해가 등교 인사를 하러 왔기에
나는 이 무렵의 학생들의 동황이 안심치 않아
'데모대에 끼는 일이 있더라도 위험은 피해야 한다'고
신신 당부를 해 주었는데
그건 지금 생각해도 잘했던 일이다.
중앙청 앞에서 효자동 쪽으로 꼬부라져 들어가는 언저리에서
내 자식은 애비의 아침 당부가 생각이 나
몇몇 학생들과 함께 통의동 골목으로 새어서 살아왔다 했는데,
이것 이렇게라도 안해 주었다면
그것 어쩔 뻔했나?
이날 밤 초저녁에야
나와 한 번지에 사는 시청 직원 임군이 돌아와 말하는 걸 들으니
시청에서도 한동안 무차별 발포를 해
시청 앞 광장이 피로 흥근한 호수를 이루었다더군,
그로부터 이틀 뒤엔가는
경복고등학교 2학년생인 문학 소년 정군이
흥분에 지친 얼굴로 나를 찾아 왔는데,
그가 더듬더듬 되뇌이는 말을 들어 보면
'시청 앞에서 야단이 났다기에
하학 후에 안종길이하고 저하고 같이
책가방을 든 채 구경을 갔었는데
마구잡이로 막 총알이 날아오잖아요?!
정신 차려 우리 둘이는 뛰어 달아났는데,
종길이는 운이 나빠 그 총알에 맞아 죽고
저만 혼자 살아 남았지 않아요?!였네.
이때 이렇게 죽어 지금 4·19 의사로서 모셔져 있는 안군은
4·19 한 해 전인 1959년 가을
내가 경복고등학교 교내 글짓기 백일장의 심사의원으로 나갔을 때
시로 입선시켰던 시 소년이었는지라
또 그 위령제에도 몇 차례 끼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 뒤 그를 두고 추모시도 썼고
인제부터 앞으로 공부해 나가야 할 이 소년의 목숨이
이렇게 타력으로 끝나고 만 데 대한 내 분한과 슬픔은
지금도 그때나 다름이 없네.
나는 이때의 이 따분한 정치적 사태와는 상관없이
6·25 사변 이후 골목해 온
신라 주제의 시험적인 자작시들을 모아
《신라초新羅抄》라는 시집도 한 권 이 해에 발표했고,
또 〈신라 연구〉란 제목의 교수 자격 청구 논문도 문교부에 내어
겨우 부교수의 자격도 하나 얻어내게는 되었는데
가만 있거라, 이 해에 내게 제일로 재미있었던 건 무어냐 하면
그런 시집 출판이나 부교수 자격증보다도
'메리센트 하니카트'라는
이쁜 미국인 여류시인 하나를 감족같이 새로 사귀게 된 일이었군.
'저는 서선생님 시를 좋아하는 한미성이란 사람으로
지금 반도호텔 1층 다방에 와 있습니다.
분홍빛 치마저고리를 입은 외국인이니
알아보기 쉬울 겁니다.
나와 주시겠습니까?'
하는 전화를 보내와서 나가 보았더니,
미국 영화 여배우 '크르데트 콜베르' 비슷한 얼굴이
새로 나와서 노래하겠다는 오월 꾀꼬리 같은
30쯤의 좋은 푸른 눈의 미인이었네, 그 한미성 양은······.
'옛날 왕궁에나 한번 가 보실까요?' 하니, 선선히 딸라 주어서
우리는 때마침 늦가을의 창덕궁 비원의 숲속에 섰는데,
'신화가 따로 없다. 이게 바로 신화다'는 생각만 들었네.
4·19보다도 정권 교체보다도
그야 물론 내게는 더 매력이 있었지.
뒤에 들어 알았지만
우리 한국인들의 편이 되어 그 성명도
'한미성韓美聲'이라고 고친 이 여인은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생 때 시를 잘 써서
그 상으로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와도 친교를 가졌던
그래 한동안은 그곳 시지 《포에트리》의 동인이기도 했던 사람으로
한국에서의 이때 현직은
전주 기전여고의 교장 겸 선교사였네.
하늘은 나 같은 사람에게도 또 한번 마음을 쓰시어
이 좋은 친구 하나를 밀파하신 거였지. .....................................P127~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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