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산책 ▒/이해인수녀님

연필을 깍으며

나무향(그린) 2006. 8. 25. 18:49

 

연필을 깍으며

 

 

오랜만에

연필을 깍으며

행복했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에

수녀원에 와서

채 익기도 전에

깍을 것은 많아

힘이 들었지

 

 

이기심

자존심

욕심

 

 

너무 억지로 깍으려다

때로는

내가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

대책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다는 깍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청빈하다고

자유롭다고

여유를 지니며

곧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깍아내리는 세월의 칼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깍이면서 사는 지금

나는 왠일인지

쓸쓸해도 즐겁다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이해인수녀님 시집에서,

 '연필을 깍으며'를 옮기며,

 앞뒤가 뭉툭해진 제 몽당연필을 이미지로 담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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