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깍으며
오랜만에
연필을 깍으며
행복했다
풋과일처럼
설익은 나이에
수녀원에 와서
채 익기도 전에
깍을 것은 많아
힘이 들었지
이기심
자존심
욕심
너무 억지로 깍으려다
때로는
내가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았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몰라
대책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
아직도 내게 불필요한 것들을
다는 깍아내지 못했지만
나는 그런대로
청빈하다고
자유롭다고
여유를 지니며
곧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깍아내리는 세월의 칼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깍이면서 사는 지금
나는 왠일인지
쓸쓸해도 즐겁다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이해인수녀님 시집에서,
'연필을 깍으며'를 옮기며,
앞뒤가 뭉툭해진 제 몽당연필을 이미지로 담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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