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권무심재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69) 어떤 사람 (천지에서)

나무향(그린) 2018. 5. 20. 06:26

어떤 사람 / 이형권

-천지에서

'

 

어떤 사람이 백두산에서 천지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살았습니다.

왜 입니까. 이것은 기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또 백두산에서 천지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살았습니다.

왜 입니까. 이것은 습관입니다.

 

 

어떤 사람이 또 백두산에서 천지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죽었습니다.

왜 입니까. 이것은 실수입니다.

 

 

어리버리 조선족 청년이

우리를 어리둥절 즐겁게 해 주었던 백두산 유머처럼

세상의 모든 일에는 그럴 듯한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예정된 인연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막연하지만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려 여행길에 나섰고

거기에서 한 사람의 길동무를 만났습니다.

 

 

심양 의과대학 3학녕의 송문찬군,

축구를 좋아하고 공치기(농구)를 잘한다는 스물 한 살의 청년은

인천에 나가 돈벌이를 하는 아버지와 허드렛일을 하는 어머니를 위해

방학이면 여행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아니 그이의 어머니는 이제 너도 클 만큼 컸으니

학비 정도는 벌어서 공부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는 좋은 의사가 되겠다는 신심이 있으나 꼭 그렇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싶다고 합니다.

 

 

월드스페이스투어, 서툰 조선말로 쓴 푯말을 치켜들고 있던 청년은

귀한 손님들이니 잘 모셔야 한다는 사장님 말씀에 주눅이 들어 있었고

간단치 않을 것 같은 사태에 나도 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양에서 환인과 통화를 거쳐 송강하까지 긴 하루 동안의 여정은

서파 최고의 호텔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숙소에서 마무리가 되었고

초행길인 듯싶은 청년은 무언가에 열심인 듯 분주하기만 합니다.

 

 

그곳에서 이틀 밤이 예정되었지만 나는 단호하게

다음날 숙소인 북파의 백화림으로 옮기겠다고 했고

청석봉 아래5호 경계비 코스를 오르는 동안 청년은 홀로 남아서

손님들의 짐 가방을 꾸리기로 했습니다.

 

화려한 가방과 고급스런 옷가지 귀중품을 잘 챙겨야 한다는 말에

조금은 긴장한 듯도 하였고, 이 정도야 '일없다'는 듯

자신만만하기도 했습니다.

 

숙박지가 바뀐 이후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빨치산 부대의 밀영지 같은 상림지대의 야전도로를 이동했고

북파의 천문봉과 장백폭포를 지나 천지 못가까지

백두산의 감동은 고된 여정 속에 녹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3일째 되던 날 지친 몸으로 속소에 돌아오니

호텔방이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황당한 처사에 어이가 없어 사실을 알아본즉, 송문찬군이

귀한 분들의 물건이 손을 탈세라

청소를 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마치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고

순간 모든 것이 봄눈 녹듯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는 상기된 모습으로 직원들과 방마다 청소를 하느라 진땀을 냈고

이때부터 나는 이 순진무구한 청년에게 매료당해 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짧았다고 사과했고

나는 당신의 생각이 너무 깊었다고 위로했습니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어설펐던 초보자의 시절이 있을 것입니다.

첫 사랑 첫 고백 첫 직장…

그리고 또 처음으로 상주喪主가 되었던 때처럼

세상 사는 일이 그리 녹녹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어리버리 초심자 시절이 있었습니다.

상경하여 첫 직장으로 출판사에 취직을 했었는데

3개월의 수습을 마치고 첫 번째로 만든 책이 김남주 시집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페이지 숫자를 잘못 계산해서 장 도비라에

백지를 집어넣는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책이 창고에 들어온 후에야 발견되었고

나는 뜨거운 화로를 얼굴에 뒤집어쓴 심정이었습니다.

 

대인이셨던 마병식 사장님은 촌놈 기죽을까 봐 호탕하게 웃으셨지만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긴 영어의 시간을 끝내고 출옥한 후 펴낸 시집《솔직히 말하자》가

솔직히 말해서 나에게는 마지막 출판사 경력이 되었고

이후 나는 바람처럼 흐르며 여행길에서 생계를 꾸려 왔습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송문찬 군의 모습에서

나는 문득 나의 옛 모습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찍혀 있어 놀랐습니다.

내가 분명 저와 같이 황망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일이 무엇이었드라… 무엇이었드라…

한참을 생각하다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그 일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강의를 할 때면 시선을 둘 데가 없어 난감해했고

인사 나누기가 쑥스러워 에둘러 서성이곤 했으니

영락없이 나도 이 숫기 없는 청년처럼 촌뜨기였던 셈입니다.

 

 

한 시절은 정말 마음 다하여 성심을 기울이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열의에 불타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청중들과 스스럼없이 눈빛도 맞추고 농담도 건네지만

그런 원숙함보다도 노련함보다도 이 순박한 청년처럼

마음속 깊이 뜨거운 가슴을 간직한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백두산에 올라 피어오르는 흰 구름에게 물었습니다.

두메양귀비꽃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왜 처음처럼 그대를 사랑하지 못했는가.

나는 왜 처음처럼 문학을 사랑하지 못했는가.

나는 왜 처음처럼 여행을 사랑하지 못했는가.

 

천지 못가에서 묻고 또 물었습니다.

천지는 푸른 물처럼 고요하기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