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권무심재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67) 눈 내리는 밤, 설국의 꿈에 젖다 (아오모리에서)

나무향(그린) 2018. 5. 18. 07:13

 

눈 내리는 밤, 설국의 꿈에 젖다 / 이형권

-아오모리에서

 

눈 내리는 밤이면 웬일로 나타샤가 그리워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이지만

나타샤는 연약하고 순수한 존재,

아득한 북극北國의 서정을 간직한 여인의 이름입니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혼자 앉아서 쓸쓸히 소주燒酒를 마시는 시인처럼

그렇게 나타샤를 사랑하고 세상을 버리고

깊은 산골로 들어가고 싶은 꿈에 젖습니다.

 

 

가난하고 쓸쓸한 사랑

다시 품을 수 없는 세월의 저 먼 언저리

회한처럼 눈 내리는 밤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북쪽의 영토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어유魚油 등잔불 뒤척이는 백두산록의 밤은

찾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되었고

낯선 이국 땅의 설국雪國에 들어 그리움을 달랩니다.

 

눈의 고장, 일본 동북 3현의 최북단에 위치한 아오모리는

오지 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자연에 깃든 소박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곳입니다.

 

아오모리의 겨울은 11월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3월까지 눈! 눈! 눈!

상상할 수 없는 적설량으로 감동을 안겨줍니다.

 

때묻지 않은 새하얀 눈이 사람 키를 넘게 쌓여 있고

그 위로 하염없이 눈발이 날리고

바람도 눈발로 풍경도 모두가 순백의 너울을 쓰고

긴 겨울울날의 꿈에 빠져 있습니다.

영혼마저도 청량해진 느낌…

 

이곳의 눈은 일곱 가지의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감성이 풍부합니다.

가루눈, 알맹이눈, 솜눈, 싸라기눈, 물눈, 야무진눈, 얼음눈…

그중에서도 깊은 밤, 삼나무 숲 속에 내리는 눈보라는

청음聽音의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마오모리의 진경입니다.

 

 

하코다 산기슭의 분화구가 함몰되어 형성된 도와다 호수에 가면

백조 떼와 함께 유람선을 타고 겨울 호수의 나그네가 됩니다.

 

밤이되면 도화다호의 겨울이야기라는 테마로 축제가 열리고

청아한 성음의 사미센 연주와 함께 불꽃놀이가

얼어붙은 호반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노송나무, 너도밤나무, 단풍나무 숲이 원시림을 이룬 오이라세 계류는

문명의 숨결을 거부한 자연의 숲으로

겨우내 백색의 산호초 같은 눈꽃을 피워 냅니다.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서 감춰진 비탕秘湯 온천에 앉아

온몸으로 느끼는 짜릿한 기분은

설국으로 떠나 온 겨울 여행의 묘미를 만끽하게 합니다.

 

 

동화 속 같은 눈의 계곡, 오이라세 그랜드 호텔에 가면

삼나무 숲의 정령들이 춤을 추며 내려오는 거대한 굴뚝 난로가 있고

그윽한 향을 뿜어 내는 모닥불은 밤을 새워 타오릅니다.

 

창밖에는 먹구슬 같은 까만 밤과 순백의 설원이 펼쳐지고

나그네의 여수旅愁는 오랫동안 잠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 밤, 나타샤는 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를 기다리겠다는 막연한 그리움만으로도 행복하고

눈 오는 밤의 상념은 끝이 없습니다.

 

어디선가

설해목雪解木 한 가지가 부러져 내리고

삼나무 숲 속에서 들려오는 눈송이의 화음和音이

끝없이 밤의 정막을 감싸고 돕니다.

 

시간을 잊은 듯 송이 눈이 고조곤히 내리는 밤

모닥불 가에 앉아서 쓸쓸히 소주를 마시며

그리운 이름 나타샤를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