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해 가는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 / 이형권
-경 주 기 행
아무런 계획도 없이 길을 나섭니다.
일정표도 없고 딱히 장소를 결정해 두지도 않았습니다.
예고했던 가을 여행을 접고 고단하고 분주한 날들을
산과 들에서 정처 없이 보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달래 줄 한줄기 바람도 없이
속절없는 시간들을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위안이 있었다면 언제고 헤매고 싶은
그리운 여행길 몇 곳을 꿈꾸는 일이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서라벌의 뒤안길과 옛 무덤이 있는 풍경입니다.
천년의 왕도, 화려했던 시절은 가고
추억만이 남아 있는 작은 영토에 가 보고 싶었습니다.
면목 없이 찾아온 고향 마을의 잿등에서
해질녘 풍경을 바라보던 날처럼
초라한 길손의 마음을 달래줄 그리움이
그곳에는 풀꽃처럼 피어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왕릉에서 왕릉으로 이어지는 서러벌의 옛길
안개와 이슬, 바람과 별빛이 머물다 가는 그 폐허의 뜨락에서
뒤척이는 솔숲의 물기어린 바람 소리를 들으며
무덤 앞의 석상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소멸해 가는 시간의 의미를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경주에 가면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세월이 가도 신통치가 않은 더딘 젓대 소리를 벗 삼아
경주의 폐허와 후미진 옛 풍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찍이 화업畵業을 접고 울산으로 낙향했다가
서라벌의 옛 마을에 든 지 십수 년
그이는 지금 낭산 자락 솔바람 소리 그윽한 효공왕릉 곁에
작은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옛 마을에서 고가 몇 채를 옮겨 와 수오재守吾齋라 이름 짓고
철모르는 소년처럼 살고 있습니다.
바람처럼 떠도는 일이 좋았을까요.
아니면 재주와 열정이 그만 한 까닭이었을까요.
한 사람은 그림 그리는 일을 접고
한 사람은 시 쓰는 일을 접고
외로운 길사람이 되어 떠돌았습니다.
지난 꿈이 영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애써 외면하고 그냥 행운유수의 길에 머물기를 좋아합니다.
둘은 그렇게 동변상련이 있나 봅니다.
불현듯 생각나서 전화를 걸면
세월 저편에서 한결같이 "형권아 그쟈!"
아랫녘 말씨에 묻어나는 정겨운 음성…
마음 둘 곳 없는 날엔 어스름 저녁 길을 쫓아
그이의 낡고 오래된 거처에 찾아가 그이가 사랑에 빠졌다는
뒷동산 솔밭에 우는 바람 소리를 오래도록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행은
"형! 쓸쓸한 날에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줘."
"형! 그믐날 조각달이 어여쁜 곳이 어디야."
"형! 서라벌의 슬픈 사랑이 깃든 곳에 가고 싶어."
이렇게 마음 가는 대로 떠돌아 볼 생각입니다.
'▒▒▒▒▒※※☆▒▒ > 이형권무심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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