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해의 고독한 여수를 간직한 외딴섬 / 이형권
-가거도에서
다시 그 바닷가의 황홀한 저녁을 찾아갑니다.
섬등곶의 바람 부는 초원에 앉아서
황홀하게 떨어지는 낙조의 빛을 사랑하기 위해 가거도로 갑니다.
가거도는 서남해의 끝자락에 위치한 고독한 나그네의 섬
다가서지 않으면 결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고하고도 외로운이 깊은 섬입니다.
그곳에는 망망한 수평선을 마주하고 선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먼 옛날 파도에 떠밀려 온 사람들의 조개 무덤이 있고
세상을 버리고 깊은 바다로 숨어 들어온 우투리의 자손들이
송장물처럼 깊은 바다에서 삶을 건져 올리던 곳
폭풍의 시간에 쫓겨 피항한 선박들처럼
들여다보면 어부들의 일상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심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뒤엉킨 아우성소리
먼 데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같은 풍경 속에서
낡은 수틀 같은 한 생애가 애처로이 앉아 있습니다.
슬픈 일도 기쁜 일도 해풍이 씻겨간 세월인지
사람들의 온기가 떠나 버린 돌각담을 돌아서면
거기,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얼마나 그립고 소중한 시간 속에 나부끼고 있는 것인지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황무지가 되어 버린 교정에서
책을 읽던 소녀의 상像은 아직 무사한지 모르겠습니다.
후박나무가 선 벼랑 끝 외딴집에 사시던 할머니는
올해도 텃밭에 깨꽃을 피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둠이 내린 긴 밤의 어귀를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겁 많은 짐승처럼 서 있던 언덕 위의 빈집은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듯 비밀스럽고
가슴 서늘해지는 외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버려 두었던 시간과 마주하고자 합니다.
하늘빛이 적막해지도록
단순하고 무료한 나그네가 되어 보겠습니다.
두령여 너머 장판지 같은 바다에서
사라져 간 날들이 그리워질 때까지
황금빛 일렁이는 추억의 그물을 건져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 이형권무심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63) 비 내리는 밤, 파두를 듣다 (리스본의 어느 주점에서) (0) | 2018.05.14 |
---|---|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62) 소멸해 가는 시간의 풍경을 찾아서(경주기행) (0) | 2018.04.15 |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60) 여름 바다에 길을 묻는다(한려수도에서) (0) | 2018.04.13 |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59) 보리밭 물결치는 섬 마을에 띄웁니다(청산도에서) (0) | 2018.04.11 |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58) 비 내리는 날 밤의 천둥소리를 찾아서(대원사에서) (0) | 2018.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