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 밤의 천둥소리를 찾아서 / 이형권
-대원사에서
어쩌자고 이렇게 처량한 여행을 꿈꿔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비 내리는 날 밤 깊은 산중, 외딴집 같은 곳에서의 뒤척이는 밤…
처마끝 낙숫물 소리는 부질없는 회한의 정수리를 치고
대숲에는 엉켜버린 날들의 인연이 휩쓸려 다니고
먼 곳에서는 깊은 한숨 같은 천둥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 밤엔 정처 없이 떠나는 나그네가 되어서
막막한 어둠의 그늘을 불러 마주 앉아 있고 싶습니다.
쓸쓸하고 적막하지만 비 오는 날 밤에는
빗소리가 있고 바람 소리가 있고 천둥소리가 있고
둥지를 찾아가지 못한 새들의 울음소리가 있습니다.
탄식 같기도 하고 아우성 같기도 하고 비명 소리 같기도 한 삶들,
마주하고 선 모든 것들이 존재를 이끌어 가고 있지만
실상實相은 알 수가 없고 흠뻑 빗소리에 젖는 날들이 많습니다.
스님은 말합니다. 빗소리에는 소리가 없다고…
소낙비가 허공 가득 쏟아진다 해도 바람과 초목과 대지가 없다면
가던 길을 멈추고 그것을 듣는 밝은 귀가 없다면
빗소리는 끝내 빗소리가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바람소리도 천둥소리도 새들의 울음소리도
허공과 초목과 대지가 만들어 내는 아슬아슬한 확률.
수없는 관계로부터 피어난 한줄기의 빛,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연기. 한 조각 구름처럼 일어났다 사라져 가는 길
그 속에 내가 있고 당신이 있고 비가 내리는 날의 밤이 있고
고요히 웅크리고 앉은 산사의 마룻바닥이 있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새로운 길이 시작되듯이
미망 속을 헤매는 속인에게는 오직 모를 뿐!
그 캄캄한 생각의 바닥 위에서 한 사람의 스승을 만납니다.
현장玄藏스님, 온화한 미소 속에 현묘함을 간직한 수행자
때로는 가랑비에 젖어들 듯 잔잔하고
때로는 작두샘물처럼 시원하게 쏟아지는 말씀들.
바람에 이는 잎새처럼 뭇 중생들의 삶을 설레게 하지만
광야에 홀로 서 있는 듯 쓸쓸하고 고독한 수행자
장맛비 쏟아지는 날,
혹은 염천 더위 속에 흰 연꽃이 눈 뜨는 날,
천봉산 대원사 선방에 앉아서
소리 없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까지
마음 깊이 고요해 지는 길손이 되어 보겠습니다.
'▒▒▒▒▒※※☆▒▒ > 이형권무심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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