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빈 의자를 찾아서 / 이형권
-불일암에서
눈 내린 날, 산사의 오솔길은 순결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의 번거로운 생각들이 생선뼈처럼 가지런해지고
아무도 오르지 않는 그 길에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가는 일은
설레임과 두려움이 교차합니다.
잘살아온 일 못살아온 일, 허물 많은 세월들이
홑이불을 덮고 창백하게 떨고있습니다.
바랑을 짊어지고 떠도는 수도자의 행각도 아니고
먹이를 찾아 나선 산짐승의 행령도 아닌,
번뇌 많은 속인이 걸어간 길은
언제나 사위스러울 뿐
개울을 건너 헐벗은 산자락을 돌아 대숲 길에 들어서면
적막하던 겨울산도 푸근해집니다.
어느 스님의 배려인지 길에는 나무의자가 놓여 있고
그곳에 앉으면 그리움에 야윈 바람 소리가 휩쓸고 지나갑니다.
길은 다시 작은 암자로 이어지고
터널 같은 대숲을 지나 사립문을 밀치면
주인 떠난 암자가 해쓱해진 얼굴로 길손을 맞아 줍니다.
봄이면 매화꽃이 피고,
여름이면 후박나무 잎새에 빗소리가 정겹고
가을이면 가랑잎이 쌓이고, 겨울이면 푸른 대숲이 춤을 추는 곳…
스님은 강원도 어느 산골, 오두막집으로 떠나셨다 합니다.
암자엔 빈 의자와 흰 고무신만 남아 있고
조계산은 텅 비어 있는 듯 바람 소리만 가득합니다.
마른 잎이 부딪치며 사운거리는 갈참나무 숲과
은은한 솔바람이 화음을 이루고 지나가더니
심연의 파도 소리 같은 대숲바람이 온 산을 흔들어 놓습니다.
인적이 끊긴 날 암자는 마치 대숲의 도량 같습니다.
모두가 제 빛을 잃고 숨죽여 동면의 계절을 견디고 있을 때,
대숲만이 홀로 깨어나 청아한 목소리로 겨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작은 바람 한 점이라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잎새에 숨겨 두었다가
빈 의자와 흰 고무신의 적요를 채우고
처마 끝의 풍경 소리를 울리고 갑니다.
고요할 때는 우물 속처럼 적막하지만 때를 만나면
함성처럼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대숲의 바람 소리입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대숲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처마 밑에 걸린 말씀을 일으켜 세워
또다시 내 가슴에 파문을 던져 줍니다.
세상사 모든 일들은 한줌 재처럼 흩어져 가고
안상하게 뼈를 드러낸 세월이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어느 길손이 머물며 이 바람 소리 들을 수 있을는지요.
돌아보면 세상도 모두가 순간을 머물다 가는
바람의 거처인 것을…
겨울 암자의 풍경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 > 이형권무심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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