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홀로 깊어 가는 길 / 이형권
-염 불 암 에 서
가을이 동구 밖까지 찾아와 소곤거릴 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러 가는 소녀의 마음처럼 길을 나섭니다.
해마다 가을 바람이 가슴 한 모퉁이를 허물어 내릴 때
세상을 떠도는 한 사람의 나그네가 되어 그 길에 들었으니
그리움이 깊어 먼 하늘가를 떠도는 밤 물결소리 같은 곳
그곳에 가면 외로움이 깊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길은 월정사 산문 밖 전나무 숲길쯤에서 시작되어도 좋습니다.
명개리에서 산판도로를 타고 넘는 북대령 길이어도 좋습니다.
신라의 동종 소리 청아하게 떠도는 상원사가 있고
적멸보궁에 부처님 진신사리 고이 모셔진 곳
누군들 이 산중의 역사를 모르랴만
처음처럼 언제나 마음 설레이는 곳,
그 곳에 저 홀로 깊어지며 낙엽 쌓이는 외로운 길이 있습니다.
오대산 서쪽 봉오리 장령봉으로 오르는 길
적막한 길을 걸어온 이들에게만 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 길은 세상을 버리고 세계를 얻는 독관지처獨觀之處의 길이 있습니다.
전나무는 제 몸 속의 텅 빈 세월을 이기지 못해 쓰러졌고
백양나무는 처녀처럼 부끄럽게 속살을 벗어 내고
물푸레나무는 또 허물 많은 인간처럼 울굿불굿 물이 들어 있습니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홀로 앉아 부처를 생각하는 집
염불암念佛庵이있습니다.
싸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마음까지 환해지는 암자 한 채…
모습은 화전민이 살던 모습 그대로인데
적막한 풍경은 도솔천에 이르렀고
장작더미를 둘러싼 모습은 등신불이 되어 있습니다.
스님마저 먼 곳으로 출타하셨는지
뜰 앞의 의자에는 적요한 가을빛이 쌓여 있고
암자는 외로움이 깊어 보입니다.
오대산의 가을이 깊을 대로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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