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권무심재

슬픈것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 (55) 저 홀로 깊어 가는 길(염불암에서)

나무향(그린) 2018. 4. 7. 06:51

저 홀로 깊어 가는 길 / 이형권

-염 불 암 에 서

 

 

가을이 동구 밖까지 찾아와 소곤거릴 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러 가는 소녀의 마음처럼 길을 나섭니다.

해마다 가을 바람이 가슴 한 모퉁이를 허물어 내릴 때

세상을 떠도는 한 사람의 나그네가 되어 그 길에 들었으니

그리움이 깊어 먼 하늘가를 떠도는 밤 물결소리 같은 곳

그곳에 가면 외로움이 깊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길은 월정사 산문 밖 전나무 숲길쯤에서 시작되어도 좋습니다.

명개리에서 산판도로를 타고 넘는 북대령 길이어도 좋습니다.

신라의 동종 소리 청아하게 떠도는 상원사가 있고

적멸보궁에 부처님 진신사리 고이 모셔진 곳

누군들 이 산중의 역사를 모르랴만

처음처럼 언제나 마음 설레이는 곳,

그 곳에 저 홀로 깊어지며 낙엽 쌓이는 외로운 길이 있습니다.

 

 

오대산 서쪽 봉오리 장령봉으로 오르는 길

적막한 길을 걸어온 이들에게만 제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그 길은 세상을 버리고 세계를 얻는 독관지처獨觀之處의 길이 있습니다.

전나무는 제 몸 속의 텅 빈 세월을 이기지 못해 쓰러졌고

백양나무는 처녀처럼 부끄럽게 속살을 벗어 내고

물푸레나무는 또 허물 많은 인간처럼 울굿불굿 물이 들어 있습니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홀로 앉아 부처를 생각하는 집

염불암念佛庵이있습니다.

싸리문을 밀고 들어서면 마음까지 환해지는 암자 한 채…

모습은 화전민이 살던 모습 그대로인데

적막한 풍경은 도솔천에 이르렀고

장작더미를 둘러싼 모습은 등신불이 되어 있습니다.

스님마저 먼 곳으로 출타하셨는지

뜰 앞의 의자에는 적요한 가을빛이 쌓여 있고

암자는 외로움이 깊어 보입니다.

오대산의 가을이 깊을 대로 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