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삼경, 산사의 문빗장을 만져 보리라 / 이형권
-통도사에서
그리운 이여, 오랫동안 적조했습니다.
알 수 없는 삶의 밑바닥을 들여다보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냥 쓸쓸히 돌아온 발길이었습니다.
여독으로 한동안은 두문불출하였다가
다시 천석고항泉石膏肓을 벗 삼아서 부질없을 길을 나섭니다.
비뚤어진 것은 비뚤어진 대로
찌그러진 것은 찌그러진 대로 살아 있듯이
나의 삶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못한 채
남루하게 펄럭이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이곳을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종가집 같은 큰 절에 의탁하여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고 싶었나 봅니다.
고요하고 소박한 절집의 뜨락에선
감당할 수 없는 번뇌의 그림자가 너무 큰 탓에
대가람의 그늘 속에 몸을 숨 긴 채
위없이 빛나는 정신을 바라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걸어온 길섶마다
그리운 것들은 얼마나 총총한가요.
이별의 날이 찾아와 가신 뒤에도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눈물짖자
스승은 문도들에게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이별은 아름다운 만남을 기약하고
서글픈 이별은 서글픈 만남으로 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무정한 세월이야 어이 말로 다 하겠습니까.
새날은 밝아 왔고 우리가 다시 사랑해야 할 일들이
저렇듯 애처롭게 서 있습니다.
머지않아 추위 속에 매화꽃이 피어날 것이고
그리움에 잠들지 못하는 이들은 문밖을 서성일 것입니다.
그대가 오래도록 부재중인 날
나는 영취산 그늘에 잠긴 밤의 적막을 찾아서
야삼경, 혹여 그대가 만져 보고 갔을 문빗장을 찾아서
겨울 산사의 뜨락을 서성입니다.
'▒▒▒▒▒※※☆▒▒ > 이형권무심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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