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충만 - (56) 모년 모월 모일-3
오랫만에 홀로 있는 내 자리를 되찾았다. 이 고요와 한적을 무엇에 비기리.
섬에서 온 아이 어제 보내고 나니 내 뜰이 다시 소생한다. 두달 남짓 부엌일 거두어주어 고맙긴 했지만, 생활습관과 질서가 달라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육체적으로 고단한 것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는데 정신적인 부담은 감내하기가 어렵다.
홀로 있는 것은 온전한 내가 존재하는 것. 발가벗은 내가 내식대로 살고 있는 순간들이다. 아무에게도, 잠시라도 기대려 하지 말 것.
부엌과 고방에 쌓인 너절한 것들 모조리 치워버렸다.
절대로 간소하게 살 것.
날마다 버릴 것.
다실에 그림을 하나 걸었다. 사방 한 자쯤 되는 까맣게 색칠한 송판에 몇 해 전 대구의 미경이가 보내준 새해 아침의 그림엽서, 청색 크레파스를 가지고 단선으로 휘적휘적 산등성이를 그리고 그 위에 붉은 해가 솟아오르는데 까치인 듯한 새 한 마리가 날아가고 있다. 이런 그림 바탕에 가는 연필로 새해 인사를 쓴 것.
차를 마시면서 몇 번이고 바라보았다. 불필요한 것들이 생략되어버린 간결하고 산뜻한 조화. 내 식성처럼 담백한 그림이다.
큰절 제재소에 가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송판, 그걸 사방 한자쯤 되게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밀었다. 황선 스님이 검은색 래커를 칠해주었다. 그 스님은 검은색을 좋아한다. 그리고 나무에 서슬을 죽이지 않고 날카롭게 모를 세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긴장감이 있어 좋다는 것. 이런 나무판에 책꽂이에 놓아두었던 그림엽서를 붙여 놓으니 운치 있는 그림이 된 것이다.
나무판과 그림의 조화. 함께함으로써 서로가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아 빛을 발한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그저 그런 하나의 소재에 지나지 않던 것이, 제짝을 만남으로 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탐생하는 이 묘리妙理.
이와 같이 사람도 제 짝을 만나야 비로소 생명의 신비를 발하면서 생동하는 인간으로 뿌리를 내릴 것이다. 그러나 제짝을 만나지 못하면 아름답고 운치 있는 삶을 이루지 못한 채 한평생을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고 말 것이다.
*
일이 있어 아랫절에 내려가면 나는 이내 지치고 만다. 눈에 보이는 것이 많고 아무 뜻도 없는 너절한 소리를 들어야 하고, 또한 안해도 좋을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 절간에서는 수도하는 향기보다는 장삿속의 사업체 같은 매케한 냄새가 짙게 풍긴다. 예전처럼 집과 집끼리 어울리고 집과 공간이 알맞게 자리잡은 그런 조화는 이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건물마다 제 자랑 하듯 여기서 우뚝 저기서 우뚝 버티고 섰으니 보는 마음이 편치 않다. 조촐하고 단아하던 옛 가람의 모습이 아쉽기만 하다.
*
비가 오려나 했더니 날이 들고 있다. 아침에 빵 구워서 먹고 후원에서 허드렛일 좀 하다. 빈 그릇들 챙겨 치우고 우물가 장명 등 곁에 돋아난 시누대도 베어내니 그 둘레가 말끔해졌다.
서울 원화 보살이 보내준 반야로 차 불전에 공양 올리고 두 잔 마시다. 금년에 마셔본 차 중에서 상품. 해마다 잊지 않고 손수 만든 차를 보내주는 그 뜻에 그저 감사할 뿐, 나는 아무 보답도 못해 염치가 없다. 효당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 멀리서 지켜보기에 고맙다는 사연 쓰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글을 읽다.
"나는 검소한 생활을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며, 내가 동료들의 노동량을 분에 넘치도록 받고 있음을 가슴이 아플 만큼 의식하고 있다."
"간소하면서도 가식이 없는 생활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유익하다고 나는 믿는다."
*
전주 덕진공원에 가서 연꽃을 보고 오다. 며칠 전 임실 관촌면에 사는 어느 분이, 요즘 전주 덕진공원에 연꽃이 한창이라는 편지와 함께 연꽃 기사의 스크랩을 보내왔었다.
몇 해 전부터 연꽃이 필 때 꼭 한번 가보리라고 생각은 해왔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어제 아랫절에서 돈연 스님 만나 함께 다녀오자고 했다. 아침 8시에 출발, 두 시간 남짓하여 덕진공원에 도착.
전체 4만 5천 평의 연못 중에서 1만여 평이 연으로 덮여 있다는데, 기대와는 달리 꽃은 듬성듬성 피어 있고 연잎만 무성했다. 알아보니 개화기가 지난 끝물이였다. 7월 중순께가 절정이라고 했다. 한 발 늦었다지만 청청한 잎 사이사이에 피어 있는 분홍빛 꽃과 은은히 묻어오는 꽃향기가 아쉬운 대로 들을 만했다.
연못을 등지고 나오면서 문득 서정주의 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가 떠올라 두런두런 외우면서 발길을 옮겼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비빔밥집에 가서 점심 먹고, 종이 파는 가게에 들러 이 고장에서 만든 화선지 두 종류 50장을 샀다. 종이를 매만지고 있으면 종이결처럼 내 마음도 섬세하고 투명하고 맑아지는 것 같더라.
입추절 아침,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하늘에는 옅은 고기 비늘같은 구름이 떠 있다.
꾀꼬리들이 아침부터 시끄럽게 지껄이고 있다. 올 여름 새로 태어난 새끼들에게 발성 연습과 날아다니는 훈련을 시키는 모양이다.
서울 한강가에서 사는 청매가 녹음해서 보내준 바흐의 풀루트 소나타를 듣다. 플루트 가락에도 가을 냄새가 배어 있다.
*
새벽 예불 마치고 뜰에 나가 은은한 달빛 바라보며 거닐다. 나무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것 같다. 이슬에 젖은 새벽의 이 고요!
달 곁에 바싹 별이 따르고 있다.
여름철에 쳐놓았던 발을 거두어들이다. 한결 산뜻해지다. 벽의 그림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검여瞼如 유희상님의 글씨로 <원관산유색遠觀山有色>의 족자를 걸다. 그림보다는 글씨 쪽이 방 안의 분위기를 훨씬 그윽하게 가라앉혀준다.
새로 걸어놓은 글씨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다. 한적을 되찾다.
가을볕에는 과일 익는 향기가 배어 있다.
-텅빈충만 - (58) 모년 모월 모일-3.................P384~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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