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충만 - (56) 모년 모월 모일
새벽 예불 마치고 나니 비 내리기 시작. 아침나절내 비 내리다. 오후에는 비 개고 숲에 파도 같은 바람소리. 오랜만에 겨울 냄새가 난다.
아침 공양하러 나가기가 죽으러 가는 일처럼 싫다. 막상 나가서 움직이면 괜찮은데, 불기가 없어 썰렁한 아래채 부엌에 들어가기까지가 머리 무겁다. 많이 게을러졌구나. 지금껏 잘 버텨왔는데.
촛불을 반닫이 위에 켜놓으니 방 안이 한결 고풍스럽다. 아늑해서 마음이 차분하고 푸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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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다가 우박 뿌리다가 진눈깨비 내리다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날씨. 밤 숲에는 바람소리 요란.
젬마한테서 깨알 같은 글씨로 쓴 엽서 오다. 서울은 폭설이 내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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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푸짐한 눈, 적설 20센티미터, 산은 적적, 왕래가 끊어지다. 군불 지피고 밥해 먹고 눈 치고 방 안에 들어앉아 없는 듯이 살아갈 것.
눈 치는 가래가 안 보여 하나 만들다.
깍두기 다 먹고, 새 독에서 김치 꺼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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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포근한 다실 창 아래 앉아 눈 녹아내리는 낙숫물 소리에 귀를 맡기다. 마치 해동하는 봄날 같다. 아직도 삼동인데.
오늘이 삭발 목욕날이라 아랫절에 내려가 목욕하다. 여럿이서 넓은 탕에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참으로 오지다. 그런데 요즘 풋중들은 대야며 비누를 쓰고 난 다음 제자리에 놓을 줄을 모른다.
홍옥이 맛이 있어 다섯 개나 먹었다.
눈 속에서 양배추 한 포기 뽑아오다. 저녁 국수 조리법 개선. 추울 때는 조채를 볶은 냅비를 잠깐 불 위에 놓았다가 삶은 국수를 그대로 냄비에 넣어 섞으면 더운 국수를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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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동짓달 초하루. 불전에 차 공양.
저녁때 설화를 신고 산을 한 바퀴 돌다. 눈 속에 매달려 있는 빨간 청미래 열매가 아주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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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눈이 내리다. 요 며칠 동안 사람이라는 생물을 보지 못했다. 사람을 대하지 않으니, 이 산중에 사람은 나 하나뿐인가 하는 착각이 든다.
겨울철이면 소화상태가 안 좋은데 운동 부족 탓인가? 엊그제 설한풍에 전기가 나간 채 감감소식이다. 오늘은 차도 한잔 마시지 못했다.
해질녘부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진다. 이렇게 되면 며칠 동안 길이 막히겠다. 나는 눈에 갇히더라도 내 식대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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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무릎께까지 쌓여 눈을 치느라고 아침나절내 땀을 흘리며 끙끙거렸다. 아래채로 가는 길과 우물길, 그리고 나무 벼늘과 정랑으로 내왕하는 길이 이 암자의 기본적인 통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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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가에 자란 배추 한 포기 뽑아 낮에는 쌈 싸먹고, 저녁 공양에 된장 풀어 배춧국 끓였더니 맛이 기막히더라.
프랑수와 고가 쓴 폴란드 자유노조의 기수<바웬사>를 읽다. 그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제도가 어떤 것이든 간에 진실과 정직에 바탕을 두지 않는 사람들과는 나는 상종하지 않는다. 진실, 그것은 곧 인간이다. 진실에 거역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온전한 사람은 진실을 등 질 수 없다."
어제 아침부터 108배 절하다.
아궁이에 쌓인 재를 바람이 멎은 사이에 치다. 재 쳐서 담을 통을 가벼운 것으로 하나 사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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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시장기를 느끼게 하는 저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속에 묻은 때도 씻기는 것 같다.
야나기 무네요시 의 <공예문화>를 읽다.'
순수한 아름다움, 평상성, 건강성, 단순성 등에 대한 주장에 공감.
"먹 이라는 한가지 색은 빛이 없는 빛깔이 아니라, 모든 빛깔을 포함한 색을 의미한다.
단순이란 단지 단조롭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질없는 요소를 모조리 생략하고 반드시 필요한 요소만으로 구성된 결정을 의미한다.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집약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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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절에서 울리는 새벽 종소리 듣지 못해 뒤늦게 일어나다. 제시간에 일어날 것!
군불 지펴두고 더운물에 속옷 빨다.
앞산에 서리는 안개, 볼 만 하다.
내일부터 추워진다는 기상 예보. 무 얼지 않도록 뽑아서 곳간에 넣다. 알량한 채소 농사. 무청 국거리로 쓰기 위해 얼기설기 엮어서 처마 밑에 매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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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 세 사람 올라와 집 뒤 잡목을 쳐내다. 지난 여름 우거져 칙칙한 걸 보고 마음낸 것이다. 쳐놓으니 훤출해서 좋다. 이제는 여름철에도 맑은 바람이 돌겠다. 내일 하루 더 와서 나무 패고, 감로암 쪽으로 가는 길 치도록 했다. 내 손이 미치지 않은 길 거들어주니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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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웬 미친 중이 올라와 전생에 자기가 단군이었다고 하면서 한참 떠벌리다가 내려갔다. 사람 종류 많듯이 중 종류도 많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을 대했을 떄는 아무 대꾸도 말고 입 다물고 있어야 한다. 뭐라 대꾸하다가는 똑같이 미친놈이 되고 마니까.
한실장으로 오지 항아리 사러 갔더니 나오지 않아, 재 쳐내는데에 쓸 고무통을 하나 사왔다. 굴뚝 연기 새는 데 흙 이겨서 때우고, 감로암 쪽에서 오는 갈림길에 표지를 해두다. 길을 헛들어 고생하는 일이 잦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은 뭘 해먹을까 망설이다가 양배추에 당근 넣어 국 끓이고 빵 구워서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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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공양 무렵 감로암에 머물고 있는 덴마크 출신의 추강 거사네 일행이 현음 스님과 함께 오다. 떡국 끓여 먹고 차 마시고 달빛 아래 돌아가다. 여섯 살 난 킴이라는 사내아이가 아주 귀엽게 생겼다. 이 다음 크면 자기도 스님이 되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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