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충만 - (55) 단 한 번의 기회
이른 아침 한때, 동이 트기 바로 전 숲 속에서는 온갖 종류의 새들이 목청껏 노래를 하고 있다. 찌르레기를 시작으로 쏙독새, 휘파람새, 꾀꼬리, 밀화부리, 뻐꾸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새들이 일제히 목청을 돋우어 새 아침의 합창을 하고 있다.
그 많은 새들이 한꺼번에 쏟아놓은 소리들인데도 결코 시끄럽거나 역겹게 들리지 않는다.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완벽한 하나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새들의 합창을 듣고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게으름뱅이거나 귀머거리일 것이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 아닌 새날이다. 겉으로 보면 같은 달력에 박힌 비슷비슷한 날처럼 보이지만, 어제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 있음이다. 어제나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음이다.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뜻한다. 이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나태와 노쇠와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다.
새로운 탄생을 이루려면 우멋보다도 먼저 어제까지의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존의 관념에 갇히면 창조력을 잃고 일상적인 생활습관에 타성적으로 떼밀려가게 된다. 우리가 살아온 그 많은 날들이 빛을 발하지 못한 채,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그저 그런 날로 사라지고 만 것도 이 기존의 관념에 갇혀서 맹목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알아차릴 때 죽음은 결코 삶과 낮설지 않다. 우리는 죽음 없이는 살 수 없다. 순간순간 심리적으로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이룰 수 없다. 오늘이 어제의 연속이 아니라 새날이요 새 아침인 까닭이 바로 여기에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민주주의. 그 민주화를 가는 오늘처럼 험난한 과정을 '과도기'라고 한다. 계층간의 모든 욕구와 불만과 갈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라의 기틀이 마냥 삐걱거리는 요즘이다. 과도기는 짧아야 한다. 과도기는 빨리 건너 지나가야 할 다리다.
그런데 이 과도기가 너무 길다.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정권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정부 당국에 있다. 그리고 여소야대의 정치권에도 그 책임은 분명히 있다. 한 시대의 책임은 어느 한쪽에만 있을 수 없다. 그 시대의 구성원 전체가 함께 나누어 짊어져야 한다.
우리들 자신을 따로따로 떨어진 독자적인 존재로 알아서는 안된다. 그 어떤 계층이나 정당 혹은 이해집단이라 할지라도 한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다.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들이 관계된 집단을 따로 떨어진 독자적인 존재나 대립된 집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오늘과 같은 갈등과 혼란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선과 악은 한 나무에 열리는 열매다. 그러나 그 뿌리는 하나다. 그 뿌리는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세상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만든 세상이지 딴사람이 만들어놓은 세상이 아니다. 오늘과 같은 갈등과 혼란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 만든 것이지, 그 밖에 다른 손이 만들어놓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 스스로가 만든 현실에 우리들 자신이 지배당하고 있다. 따라서 갈등과 혼란을 푸는 것도 우리들 자신이어야 한다. 극좌가 설치면 극우가 나와 설칠 것은 묻지 않아도 뻔한 물리현상이다. 먼 역사를 들출 것도 없이 우리가 겪어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사태와 사건들을 되돌아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파국은 어느 쪽에도 득이 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우리들의 생각이나 뜻만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생각과 뜻이 시절 인연과 어우러져야 비로서 이루어질 수 있다.
과도기가 너무 길어지면 현실에 염증을 낸다. 현실에 염증을 내면 새로운 바람을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 우주의 흐름이다. 과거의 비리나 과오는 하루바삐 척결되고 청산되어야 한다. 과거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안정을 바라는 측이나 지지자들까지도 통치 능력에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지지 기반을 잃어버린다면 어디에 발을 붙일 것인가.
현정부는 그 탄생의 과정에서 타락과 탈법이 자행되긴 했지만 민주주의의 절차인 선거에 의해 출범한 정부다. 5공화국과 그 얼굴은 비슷하지만 정당한 절차를 거쳐 이루어진 떳떳한 정부다. 그렇기 때문에 극좌건 극우건 어떤 폭력집단에 의해 타도되는 것을 대다수 국민은 원치 않는다. 폭력이 새로운 폭력을 불러 일으켜 악순환을 거듭한다면 그 피해는 결국 우리 선량한 국민들이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여기저기 독버섯처럼 돋아나고 있는 횡포와 비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정권에 비해서 언론과 출판 및 결사의 자유가 많이 개선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잘못된 제도와 악법 철폐를 위해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노력하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보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신속하게 이 '과도기(난국)'를 건너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기회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려운 귀중한 시간임을 알아야 한다.
차茶의 세계에 일기일회一期一會 란 말이있다. 일생에 단 한 번 만나는 인연이란 뜻이다. 개인의 생애로 볼 떄에도, 이 사람과 이 한떄를 갖는 이것이 생애에서 단 한 번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면 순간순간을 알차게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몇 번이고 만날 수 있다면 범연해지기 쉽지만, 이것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할 때 아무렇게나 스치고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일도 그렇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만남도 그래야 하고, 크게는 나라일을 경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회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놓치면 다시 돌이키기 어렵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서로 미워하며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통과 기쁨과 사랑을 함께 나누어 가지기 위해 찾아서 만난 이웃이요 겨레이다. 사람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꼐 나누어 가질 때 진정한 인간이 된다. 1989
-텅빈충만 - (55) 단 한 번의 기회...........P361~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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