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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충만 - (57) 모년 모월 모일-2

나무향(그린) 2017. 8. 5. 05:49

텅빈충만 - (56) 모년 모월 모일-2

 

 라마크리슈나의 어록을 읽다. 맑고 투명한 속뜰이 열리는 것같다. 시시한 책을 읽으면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말 것. 양서란 잠든 영혼을 불러 깨우는 말씀이다. 

 

 그의 가르침은 대강 다음과 같다.

 

 이 우주의 근원이며 창조주인 신(Brahma)은 유형 무형 어느 쪽으로도 다 존재한다. 그 시대와 지역과 민족의 다름에 알맞은 형식과 가르침을 통해서 신은 자신을 여거 가지로 나타낸다.

 

 모든 종교의 모든 신은 이 신의 나타남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와 그 가르침은 하나인 진리(신)의 다채로운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기가 믿는 종교를 통해서 신과 하나가 된다. 이때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옳고 다른 종교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의 종교를 통해서 신과 합일하는 방법과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그 방법과 길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 이것을 목적이나 도달점인 신, 그 자체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신과 합일하는 수단으로서는 다음의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지식과 지혜를 통해서.

 둘째, 믿음과 헌신을 통해서.

 셋째,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수행을 통해서.

 넷째, 마음의 집중과 자기 절제를 통해서.

 

 인도에는 그 옛날 베다 시대부터 끊이지 않고 성자들이 출현하는 지혜의 바다가 무궁무진하다. 인류 문명을 위해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인가.

 

*

 아래채 곁에 있는 샘을 고쳤다. 사흘 전 큰절 일꾼 네 사람과 목수 두 사람의 힘으로 편백나무 판자로 귀틀을 짜서 만들어놓았었다. 그런데 바닥 틈을 막지 않아 물이 새는 바람에 그전처럼 넘치지 않았다. 우리들은 물의 압력이나 성질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

 

 어제 순천에 나가는 길에 급결 방수액과 흙손과 사와, 오늘 일꾼 두사람과 다시 샘물을 퍼내고 바닥 틈을 시멘트로 막아놓았다 이제는 물이 펄펄 넘친다.신통해서 몇 차례나 샘가에 가서 맑은 물이 넘치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이 뿌듯한 기쁨!

 

 10년 전 이 암자를 다시 지을 때 이 샘은 파래가 잔뜩 끼어 있고 개구리들이 살아 쓰지 않은 채 버려 있었다. 물에 손을 담가 보았더니 아주 파고 수량도 많아 이 샘을 고쳐 쓰기로 작정했었다. 이끼가 퍼렇게 끼어 있는 낡은 판자를 꺼내고 대신 돌을 쌓아 둘레에 진흙을 다져 넣었더니 아주 좋은 샘이 되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줄지 않았다. 여름에는 물이 차고 겨울에는 미지근하다.

 

 그런데 몇 해를 지나는 사이 개구리들이 겨울잠을 자고 가재가 집을 지어 진흙을 뚫어놓는 바람에 물이 넘치지 않고 밑으로 새나갔다. 몇 차례 구유를 들어내고 솜으로 막고 진흙으로 다져 보았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마음을 내어 다시 넘치는 샘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물 흐르는 수구를 통대를 잘라 끼워놓으니 아주 운치가 있다. 그리고 샘틀의 네 기둥은 목수 노씨의 솜씨로 연꽃을 새겨놓으니 볼 때마다 미소를 머금게 된다.

 

 원컨데, 이 샘물을 떠마시는 사람마다 갈증을 면하고 넘치는 기운을 얻어지이다. 이번 샘을 고치는 일에 애써준 이웃들도 이 인연으로 항상 맑고 시원한 삶을 이루어지이다.

 

*

 어제와 그제 줄기차게 내린 비로 인해 인명 피해가 많다. 자연의 위력 앞에 사람은 하잘것없는 미물인가? 장마 첫 시작부터 호우의 피해가 크니 올 여름 장마가 걱정이 된다.

 

 아궁이에 고인 물 18통을 퍼냈다.

 

 순천장에서 토마토 10개(값 1천 원), 호박 1개(150원), 풋고추 3백 원어치, 참외 7개(1천 원)사오다. 농산물 값이 너무 헐다가. 이러니 농민들이 농사지을 의욕이 나겠는가. 글쎄 토마토 열 개에 천 원이라니 헐해도 너무 헐하다.

 

 불일로 오르는 습한 길목에 진보랏빛 창포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

 장마철이라 눅눅해서 방마다 군불 지피다. 오후에는 더워서 삼베옷으로 갈아입다. 해질녘에는 앞산에 무지개가 돋다. 6시반에서 7시까지 세 차례나 돋다. 혼자서 보기가 아까웠다. 소나기 오다가 갠 저녁 하늘에 햇살이 비치고 이내 무지개가 돋았다.

 

 엊그제부터 현기증이 난다. 이상한 것은 돌아누우려고 할 때 천장과 벽이 빙빙 돌고 심할 떄는 메스껍고 전신에 진땀이 나면서 사지에는 맥이 빠진다. 한 달쯤 전에도 자고 일어나자 이런 증상이 한 번 있었는데, 어디에 탈이 생긴 것일까.

 

 밤에는 물것들 때문에 등불을 켤 수가 없다. 가을이 기다려지네.

 

*

 일주일 전부터 잇따라 두 차례의 태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어제 오후에는 한때 파란 하늘 조각이 열리더니 밤에는 다시 비가 뿌렸고 오늘도 종일 비가 내렸다. 이런 날씨만 계속된다면 정말 살맛이 안 나겠다.

 

 네 차례에 걸쳐 여름 수련회 마치고 나니 기도 진하고 맥도 진했다. 어디 가서 한 닷새 해놓은 밥 얻어먹으면서 더운물에 목욕도 하고 푹 좀 쉬었으면 좋겠네. 내 복에 어디 그럴 수 있겠는가. 희망 사항일 뿐이지.

 

*

 무와 배추 씨가 움이 터 오른 김장밭에 철망을 둘러쳤다. 떡잎이 자라 오를 만하면 꿩들이 내려와 심술을 부리듯이 헤집어놓는 바람에 해마다 어지간히 속이 상했다. 그리고 산토끼들도 와서 김장밭을 망쳐놓기 일쑤다.

 

 먹이(채소)를 가지고 짐승과 다투느라고 철망을 쳐야 한다니,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한다.

 

*

 눈밭이 흩날리는 몹시 추운 날, 부엌에 들어가기가 머리 무거워 7시 지나서야 내려가,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떡국 데워서 먹었다. 먹는 일이 좀 치사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요 며칠 동안 자고 일어나면 귀뚜라미가 대여섯 마리씩 내 발치에 죽어 있다. 추위와 목마름에 생을 포기한 것이다. 늦가을부터 방 안에 들어와 사는 것을 한동안은 보는 대로 집어서 밖으로 내보냈었다. 그래도 어디서 자꾸 나오는지 그 수는 줄지 않았다. 집어내다가 더러는 다리가 떨어지기도 하고 더듬이가 잘리기도 했었다. 요즘은 기운이 없어 비실거리는 걸 보니, 내가 너무했구나 싶어 후회가 된다. 이제는 손으로 건드려도 뛰지도 못한다.

 

 며칠 안있으면 몸을 바꿀 미물들에게 매정하게 대한 걸 뒤늦게 뉘우치다. 죽어 있는 귀뚜라미를 쓸어내면서, 이 다음 생에는 좋은 몸을 받아서 해탈하라고 염원하다.

 

 이 세상에는 사람과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중생들이 수없이 있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괴롭히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

 

 한번은 편지를 쓰는 걸 말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귀뚜라미한테 전에 없던 측은한 정이 갔다. 요즘 그 애들은 어디서 뭘 먹고 사는지 알 수가 없다.

 

*

부산 동래에서 법회를 보기 위해 조계산에까지 왔었다. 아침 9시에 출발하여 2시에 닿았으니 다섯 시간이나 걸렸다. 아는 불자들이 주관하는 금요 모임. 40여 명 참석.

 

 <<화엄경>><보현행원품>에 나오는 법공양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공양 중에는 법공양이 으뜸이다. 그럼 무엇이 법공양인가. 부처님 가르침대로 행하는 일, 이웃들을 이롭게 하는 일, 이웃들을 거두어주는 일, 이웃의 고통을 대신 받는 일, 착한 일을 부지런히 쌓아 나가는 일, 보살의 할 일을 버리지 않고 보리심을 떠나지 않는 일들이 바로 법공양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곧 부처님을 이 세상에 출현케 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법공양을 행하면 부처님께 공양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밤에는 마팀 부버의 <<나와 너 Ich-Du>>를 읽다. 조금씩 음미하면서 읽어야 할 책.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켜주는 내용이다.

 

*

 간밤에는 자다가 몇 번 깼다. 바깥 날씨가 너무 추워서였던가?

 

 어제 저녁부터 호박죽으로 끼니를 때우다. 이 추위에 돌 섞인 쌀 일어서 밥짓지 않고 데워서 먹으니 간편해서 좋다. 앞으로도 사흘은 더 먹겠다. 내 소화기는 먹이에 까다롭지 않아서 다행이다.

 

*

 오늘 아침도 영하 13도. 그래도 밝은 햇살이 창호에 비치니 덜 춥게 느껴진다.

 

 어제 순천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문구점에 들러 연필 한다스를 사왔다. 몇 년 만에 산 연필인가. 문구점에 들어서면 내 마음은 아직도 풋풋한 소년의 가슴, 마냥 부풀어오른다. 우리들의 유년 시절에는 제2차세계대전 중이라 문구류가 얼마나 귀했던가. 바다 건너에서 온 잠자리표 연필 한 자루만 가지고 있어도 반 친구들 사이에 부러워하는 시선을 모을 수 있었다.

 

 천 원에 HB연필 한다스. 너무 헐하다. 연필을 사가지고 와서 깎을 때 은근히 풍기는 그 향나무 냄새며, 사각사각 부드럽게 깍이는 나뭇결에서 까맣게 잊어버린 먼 날의 기억이 되살아나다. 단돈 천 원을 주고 사온 연둣빛 투명한 내 유년 시절의 속뜰.

 

 어제 나는 참으로 행복하였네.

 

*

 날씨 조금 누그러지다. 점심 후 따뜻한 햇볕 아래 석창포와 백냥금 화분 내놓고 물 주고 바람 쏘이다.

 

 어디서 보내주어 브라질의 작가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읽다. 감수성이 예민한 다섯 살짜리 '제제'라는 한 어린이를 통해 사람의 문제, 인간 비극의 근본적인 조건(가난),인간과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어린이와 어른의 티없는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인생에 있어서 슬픔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성을 지니고, 인생의 양면성을 발견하여 동심의 세계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꽃과 같은 화사함이 아니라 강물에 흘러내리는 낙엽과 같은 것이며, 삶의 결핍은 어른들의 굳어버린 상상력과 메마른 감정이 그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어리고 순진한 선의가 악의로만 받아들여져 그 어린 몸이 너무도 혹심하게 매질당하는 우리 어린 천사 제제, 크리스마스 날, 일자리를 잃고 풀이 죽어 있는 아버지에게 담배를 사드리기 위해 구두닦이통을 메고 거리를 헤매는 그 어린것의 갸륵한 마음씨에 눈물짓다.

 

 편지 부치려고 아랫절에 내려갔다가 때가 되어 점심 먹고 올라오다. 여럿이 사는 데 가서 식탁을 대해 보면, 내가 평소에 얼마나 간단하게 먹고 사는가를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내 육신에 조금은 미안한 생각, 하지만 나는 걸치적거림이 없는 '홀가분'을 먹고 살지 않는가.

 

 이 방 저 방 몇 군데 기웃거리다 보면 시간이 술술 빠져나간다. 이래서 대중살이에는 수행자만이 지닐 수 있는 절대고독을 누릴 수 없다. 수행자란 어떤 사람인가. 절대고독의 한가운데 우뚝 선 자,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자.

 

-텅빈충만 - (57) 모년 모월 모일-2.............P375~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