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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편지 - 이형권

나무향(그린) 2016. 4. 17. 07:46

복사꽃 편지 - 이형권

 

아버지, 여기는 복사꽃 피는 봄날입니다.
그곳에도 버들피리소리 들려오는 봄날이 있는지요.
올 청명절에는 고향에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산밭에 꽃들이 만발했다고 하고
산소에 파랗게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직 짱짱하십니다.
억척스런 성정 그대로 농사일을 아직 놓지 못하셨습니다.
지금도 해남에서 때마다 쌀가마니가 올라오고
온갖 곡식자루에 푸전가리가 올라올 때면
가슴이 미어질 때가 많습니다.
올해가 팔순이셔 정월 열이레 생신날에
마을회관에서 작은 잔치가 열렸습니다.
6남매와 손주들이 모여서 다복한 날이었습니다.
아버지, 그곳도 계실만 하신지요.
지난해 저는 뜻밖에 횡액을 만나서 금전수가 사나웠습니다.
아버지도 어느 해인가 백 석짜리 곗돈을 때인 적이 있으셨지요.
그때는 철부지어서 아무 것도 몰랐는데
세상사가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인지 실감했습니다.
큰 아이는 원하는 디자인과에 가겠다고 재수를 시작했고
둘째는 우려와 달리 속 깊은 아이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낙방하고 재수한다고 마음을 잡지 못했을 때
아버지의 마음에 드리웠을 그늘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사람의 일이란 이렇게 제앞의 일로 닥치고 봐야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가 봅니다.
아버지, 세상에는 늘 그렇듯 시비가 많고 갈등이 많습니다.
저는 그 모든 곡절로부터 벗어나 여전히 산천을 주유중입니다.
부와 명예를 얻어 집안의 자랑이 되지는 못했지만
제가 떠도는 길에는 온갖 꽃들과 자유로운 바람이 가득합니다.
그 길에서 봄비를 맞으며 홀로 밭을 가는 촌로를 보기도 하고
꽃그늘 속에 누워 있는 주인 모를 무덤을 보기도 합니다.
꽃들에는 저마다  향기와 자태와 기품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난만한 복사꽃을 볼 때면 저는 혼자 슬며시 웃곤 합니다.
"어쩐다고 복사꽃은 술 취한 우리 아부지 술기운처럼
저리 원색적으로 피어난다야"  하고....
아버지, 마음 쓰기에 따라 시방세계가 일념에 도달하기도 하고
천 길보다 멀리 떨어지기도 한다는데
그곳이 그렇게 멀다고는 하지만 까짓것
달밤에 잿드목 고갯길을 넘어오듯 한번 내려 오셔서
남댕이 들판이 떠나갈듯 우렁우렁 해보시지요.
아버지, 아버지 무덤가에도 온갖 꽃들이 피었습니다.
아버지의 육두문자 같은 복사꽃이 피었습니다.
저는 며칠 후면 그 복사꽃을 보러
황장재를 넘어 오십천 물길을 따라갑니다.
그길, 복사꽃 흐드러진 어느 마을의 주점에서 만나
한 잔 하시자고 소자 문안 여쭈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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