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바람이 되어 / 이형권
석남꽃 같은 가을이 와서
지나간 세월의 어떤 일들이 예고 없이 찾아와서
<마음의 뒤안길을 흔들고 갈 때
나는 바람의 영혼이 되고 싶었다
세상의 어떤 일들에도 주저하지 않고
세상의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세상의 어떤 미래에도 불안해 하지 않고
오직 바람의 여행자가 되어서
눈부시게 빛나는 11월의 오후
물결치는 찬란한 억새꽃의 바다를
한없이 걸어가고 싶었다
바람은 눈물도 없이 슬픈 골목길 지나고
바람은 애달픔도 없이 바닷가 절벽아래를 스치고
바람은 후회도 없이 고갯길과 산등성이를 넘고
생애의 마지막 잔광을 쏟아내는 석양빛이
중산간 오름의 능선으로 사위여 갈 때
그 하늘끝에 번지는 저녁 어스름 속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는 바람의 뺨에 입맞춤 하면
우리가 불렀던 노래가
바람의 환상이었음을 알게 되리라
<우리가 간직한 추억이
바람의 숙명이었음을 알게 되리라
우리가 살았던 생애의 날들이
한낱 바람의 유희와 같았음을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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