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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이야기 - (20) 어떤 여인의 기구한 인과관계

나무향(그린) 2013. 12. 7. 08:32

어떤 여인의 기구한 인과관계 - 법정스님

 

지혜의 눈을 떠 아라한이 된 미묘 비구니는 자신의 기구한 인간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원래 어떤 바라문의 딸로 태어났다. 우리 아버지는 나와 안에 널이 알려질 만큼 덕이 높은 분이었다. 이웃에 다른 바라문이 살았는데, 그 집 아들은 인자하고 총명했다.내 미모에 끌린 그는 나를 아내로 맞아 가정을 이루었다. 나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 후 시부모가 잇따라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둘째 아이를 가졌다. 남편과 의논한 끝에 친정에 가서 해산을 하기로 했다. 친정으로 가던 도중 갑자기 진통이 와서 나무 아래 자리를 폈다. 그날 밤에 아기를 낳았다. 그런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곤히 잠든 남편을 독사가 물어 죽였다. 나는 이런 사실도 모르고 새벽녘에야 겨우 일어나 남편을 깨우려고 가까이 갔다. 독사의 독이 온몸에 퍼져 죽어 있는 남편을 보고 나는 그자리에서 기절했다.

 

 아버지가 죽은 것을 보고 큰아이는 소리를 내어 울부짖었다.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큰아이는 등에 업고 갓난아이는 품에 안은 채 울면서 길을 떠났다.

 

 길은 멀고 험한데 사람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도중에 큰 강이 있었는데, 수심이 깊고 폭이 넓었다. 큰아이는 강가에 내려 두고 먼저 갓난아이를 업고 강을 헤엄쳐 건넜다. 언덕에 올라 나무 밑에 갓난아이를 내려놓았다. 이때 강 건너에서 큰아이가 엄마를 부르면서 강물로 들어오다가 그만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나는 급히 강물에 뛰어들었으나 큰아이는 이미 거센 물결에 휩쓸려 구할 수 없었다. 다시 기슭으로 올라와 갓난아이한테 돌아왔으나, 늑대가 갓난아이를 먹어 버린 뒤였다. 나는 또다시 기절했다가 한참 만에 깨어났다.

 

 나는 얼이 빠진 듯 정신없이 길을 걸어갔다. 도중에 한 바라문을 만났는데, 그는 친정아버지의 친구였다. 나는 슬픔이 복받쳐 통곡을 하면서 그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친정 소식을 물으니, 며칠 전에 집에 큰불이 나서 부모와 동생들이 모두 타 죽고 말았다고 했다. 이 비통한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또 까무러치고 말았다. 눈을 떠 보니 길에서 만난 아버지의 친구 집이었다. 그분은 혈혈단신이 된 나를 가엾이 여겨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이렇게 지내던 어느날, 그 이웃에 살던 바라문이 내 얼굴이 고운 것을 보고 아내가 되어 달라고 청했다. 의지할 데 없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로 가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 바라문은 술망나니였다. 술만 마시고 오면 망나니가 되어 갖은 학대를 했다. 나는 더 참고 견딜 수가 없어 박복한 신세를 한탄하며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 길로 바라나시로 가서 성 밖의 한 나무 아래서 머물렀다.

 

 그때 그 고장에 사는 한 부자의 아들이 사랑하던 아내를 잃고 못 잊어 하면서 날마다 무덤을 찾아와 애통해했다. 그는 몇 차례 나와 마주치더니 내게 새 아내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그의 뜻에 따랐다. 그는 지극하게 나를 사랑해 주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병들어 죽고 말았다. 당시 그 고장 법에는 미망인도 남편의 무덤에 함게 묻도록 되어 있었다. 내가 무덤에 묻혀 죽을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밤이 되자 도둑이 와서 무덤을 파고 나를 구출해 주었다. 나는 또다시 도둑의 아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도둑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붙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나는 나 자신의 기구한 신세를 한탄했다. 전생에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기에 이처럼 고통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이제는 어디에 의지해 남은 목숨을 이어 갈 것인가. 이때 문득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떠올았다. 석가족의 아들이 고행 끝에 부처이 되어 과거와 미래의 일을 훤히 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곧 기원정사로 갔다. 나무에 꽃이 활짝 핀 듯, 별 속의 달과 같은 부처님의 모습을 멀리서 보았다. 부처님은 내 곁으로 걸어오셨다. 나는 그동안 겪은 일들을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나를 가엾게 여겨 수행자가 되게 허락해 달라고 그분에게 애원했다.

 

 부처님은 시자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인을 데리고 가서 고타미에게 맡겨 계법戒法을 일러 주게 하라.'

 

 나는 고타미 밑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와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것. 모든 것은 공하고 무상하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부지런히 정진해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알 수 있었다. 내가 현세에서 받은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지만, 그것은 오로지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의 갚음으로 털끝만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곁에서 기구한 사연을 듣고 있던 비구니들이 물었다.

 

 "전생에 무슨 죄업을 지었기에 그토록 견디기 어려운 재앙을 당하셨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미묘 비구니는 다시 말문을 열었다.

 

 "자세히들 들으시오. 지난 세상에 한 부자가 있었소. 그는 재산은 많았지만 아들이 없어 작은부인을 두 게 되었소. 지체는 낮은 집 딸이지만 아름다워서 부자는 그녀를 몹시 사랑했소. 게다가 그녀는 사내아이를 낳았소. 부자와 작은부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소. 이때 큰부인은 시샘이 나서 이런 생각을 했소.

 

 '나는 비록 귀한 가문의 출신이지만 이 집안의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했다. 이제 저 아이가 자라면 이 집안의 재산을 모두 상속받을 것이다. 그때 내 처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큰부인은 질투심이 치솟아 아이가 자라기 전에 일찌감치 죽여 버려야겠다고 결심했소. 그래서 그 아이의 정수리에 바늘을 깊이 꽂았소. 아이는 시름시름 앓다가 열흘쯤 지나 마침내 죽고 말았소. 작은부인은 너무 애통해 미칠 듯했소. 그리고 아이가 갑자기 죽은 것은 틀림없이 큰부인이 저지른 일일 거라고 단정하고 이렇게 따져 물었소.

 

 '당신이 우리 아기를 죽였지요?'

 큰부인은 펄쩍 뛰면서 이런 맹세를 했소.

 '만일 내가 그대 아이를 죽였다면 다음 생에 내 남편은 독사에 물려 죽고, 남편과 내가 낳은 자식은 묵에 빠져 죽거나 늑대에게 잡아먹힐 것이오. 나는 산 채로 묻히고 내 부모 형제는 불에 타 죽을 것이오. 이래도 나를 의심하겠소? 이래도 나를 의심하겠소?'

 

 그때 그 부인은 죄와 복이 갚음이 없다고 생각해 그와 같이 맹세를 했던 것이오. 그러나 지금 다 그대로 받으면서 아무도 대신할 사람이 없소. 알고 싶소? 그때의 그 부인이 바로 현재의 이 몸이오.

 

 나는 지금 다행히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아라한이 되었지만, 뜨거운 바늘이 정수리로 들어와 발바닥으로 나가는 듯한 고통을 밤낮으로 겪고 있소. 재앙과 복은 이와 같이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오." ㅡ<현우경> 미묘비구니품微妙比丘尼品

 

<현우경>을 읽다가 이 기구한 이야기를 처음 보았을 때, 사람이 이럴 수 있는가 싶어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떤 경전을 보면, 성자도 인과관계에서만은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몇 생을 두고 얽히고설켰을 그 미묘한 관계가 새삼 두려워 진다. 사람에게는 자기 몫의 생에 대해서 그만큼 책임이 따른다. 착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매인 데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 ..............................P103~104~105~106~107~108~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