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시 - 이해인
시를 쓸 때는
아까운 말들도
곧잘 버리면서
삶에선
작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욕심이
부끄럽다
열매를 위해
꽃자리를 비우는
한 그루 나무처럼
아파도 아름답게
마음을 넓히며
열매를 맺어야 하리
종이에 적지 않아도
나의 삶이 내 안에서
시로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맑은 날이 온다면
나는 비로소
살아 있는 시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p70-71
-자서/꽃자리 선물방
하얀 문을 열면 성당의 종탑과 이끼 낀 돌층계와 언덕길이 보이는 곳, 가끔 까치들이 산책 나오는 잔디밭과 채마밭이 보이는 곳, 수녀원을 다녀가는 손님들의 가벼운 발걸음과 웃음소리가 음악으로 들려오는 곳.
나는 이 방을 "꽃자리 선물방" 또는 "누구라도 시인방"이라 부른다. 나는 매일 이 방에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글을 쓰고 가끔은 음악을 들으며 사람들을 만난다. 이 방을 다녀가는 이들에게 나는 솔숲에서 주운 솔방울이나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가비들, 몽당연필이나 앙증스런 색종이 상자를 작은 선물로 준다.
내게 말없이 참을성을 가르쳐주는 꽃과 나무들, 수도원 식구들, 독자들, 친지들……. 모두를 다시 소중한 선물로 받아 안으며 나는 오늘도 선물방 주인이 된다. 이 방을 항상 기쁨방, 나눔방의 꽃자리로 만들라는 우리 수녀님들의 목소리를 새겨듣는다.
생각을 잘 익혀야 좋은 시를 쓸 수 있고, 삶을 잘 익혀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음을 새롭게 알아듣는 가을. 그동안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은 기쁨을 다시 사랑으로 되돌려주고 싶은 나의 열망이 석류 열매처럼 툭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듣는 가을.
그동안 내가 빚어놓은 시의 글꽃들을 부족힌 대로나마 곱게 엮어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랜만에 작은 선물로 바칠 수 있는 이 가을. 나는 새삼 행복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 .................................1999년 가을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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