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무렵 어느 날 - 이해인
꽃 지고 난 뒤
바람 속에 홀로 서서
씨를 키우고
씨를 날리는 꽃나무의 빈집
쓸쓸해도 자유로운
그 고요한 웃음으로
평화로운 빈 손으로
나도 모든 이에게
살뜰한 정 나누어주고
그 열매 익기 전에
떠날 수 있을까
만남보다
빨리 오는 이별 앞에
삶은 가끔 눈물겨워도
아름다웠다고 고백하는
해질 무렵 어느 날
애틋하게 물드는
내 가슴의 노을빛 빈집................................p54-55
▽ 이해인 수녀님 계단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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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멜 수녀님들 소개로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를 알게 되었고, 나는 수녀회에서 처음 운영을 맡은 김천 성의여고에 입학해 몇 명의 소녀와 함께 수녀원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시인 유치환 님이 심사위원이었던 전국고등학생 백일장에서 ‘산맥’이라는 시로 장원을 했을 땐 정말 기뻤고 이 시는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에 수록 되어 있다. 일찍 가족의 품을 떠나 살았기에 나의 글에는 유난히 이별의 슬픔과 쓸쓸함을 노래한 것이 많다. 이 무렵 나는 수녀님들의 삶을 가장 가까이 구체적으로 지켜보면서 수도 생활의 어려움도 미리 알고 감지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길을 가리라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 한번 밖엔 없는 삶을 끝까지 투신해도 아깝지 않은 삶으로 수도 생활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사람은 왜 죽는가?’‘삶의 끝은 어디일까?’‘사랑하는 이들끼리도 왜 이렇듯 헤어져 사는 날들이 많은 걸까?’하는 의문으로 내내 궁리가 많았던 아이에게 그래도 수도 생활은 가장 멋지고 보람있는 삶의 형태로 비쳐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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