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韓何雲, 1920년 3월 20일 ~ 1975년2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한하운은 함남 함주군 동촌면(東村面) 쌍봉리(雙峰里)에서 한종규(韓鍾奎)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명은 태영(泰永).
중국 베이징 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후 함남도청,
경기도청 등에서 근무하다가 나병의 재발로 사직하고 고향에서 치료하다가 1948년에 월남,
1949년 제1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간행하여 나병시인으로서 화제를 낳았다.
이어 제2시집 《보리피리》를 간행하고, 1956년 《한하운시전집》을 출간하였다.
1958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19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黃土) 길》을 냈다.
자신의 천형(天刑)의 병고를 구슬프게 읊은 그의 시는 애조 띤 가락으로 하여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비운의 시인 한하운의 삶, 그 편린을 잠간 살펴 보다.
그의 ‘전라도길, 보리피리를 읽을 때면 심호흡을 하게 된다.
시인의 생애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상상만해도 가슴이 저민다.
그는 중학교 5학년 때 자신이 ‘문둥이’로 살아가야 함을 알게 된다.
불행 중 다행은 음성나환자였기에 겉으로 보기에 표시가 나지 않았다
처음 발병할 땐 모르고 삼 년, 알고 삼 년,온 몸에 반점이 생기기 시작한다.
어느 날 궤양을 헤어보니 900군데나 퍼져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별이 뿌려져 있는 것같이 온 몸에 반점이 뿌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맏상제이면서도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친척들이 장례를 치를 때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 근처 숲속을 울며 배회하는 동안 먹지 못해 정신을 잃었다.
한하운은 함흥에서 태어나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나병 증세가 나타난 것은 17세 때인 1936년이었다.
나병 선고를 받고는 학교를 휴학, 금강산 온천에서 치료를 했다.
한하운에게는 ‘R’이라는 여자 친구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알던 누이동생의 친구였는데,
말없이 잠적하자 금강산으로 찾아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비로봉, 마의태자 능을 보여주고, 슬픈 운명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며칠 후 숲가를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자신이 나병에 걸렸음을 고백했다.
천형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었으니
나를 잊어 달라는 말을 듣기만 하던 그녀가
잎사귀를 뜯어서 물에 띄워 보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를 그렇게 생각하다니 슬퍼요.
저는 하운 씨를 일생의 남편으로서
언약한 이상 불운에 처했다고 버리는 그런 값싼 여자가 아닙니다
.” 자살을 생각하던 마음을 간곡한 설득으로 돌렸고,
그날 이후 R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병에 좋다는 약을 전신전력을 다해 구해왔다.
병마에 남은 여명을 문학에 귀의하지 않고는 구원할 길이 없음을 알았다.
R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지만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46년 학생데모사건에 연루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나병환자라 풀려났다.
남동생이 김일성 암살 모의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가 체포된다.
R도 비밀결사의 일원으로 체포되었고, 6·25 발발 전에 처형되었다.
하운은 1949년, 신천지에 '전라도 길' 외 12편을 발표 문단에 등단한다.
57세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병마와 싸우면서 고통과 허무감에 젖어 시를 썼다 한다.
▲ 한하운 시인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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