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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충만 - (51) '마의 문턱' 앞에서

나무향(그린) 2017. 7. 30. 05:59

텅빈충만 - (51) '마의 문턱' 앞에서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겨울이지만, 한낮의 햇살에는 봄기운이 배어 있는 요즘의 날씨다. 양지쪽 나뭇가지 끝에서는 벌써부터 뾰족뾰족 새움이 부풀어오르고 있다. 며칠이 지나면 우수 이제는 또 봄의 차례다.

 

 올 봄은 어떻게 넘길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전 같으면 보릿고개와 굶주림의 봄을 걱정할 텐데, 이제는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온 나라가 앓고 있는 정치와 경제 등 사회적인 갈등과 질환을 걱정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흐름은 개방과 화해 쪽으로 물길이 잡힌 것은 틀림이 없다. 이데올로기니 이념이니 하는 낡은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나라마다 자기네 국가 이익을 위해, 굳게 걸었던 빗장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이와 같은 세계의 흐름은 그 어떤 고집이나 트집으로도 막아낼 수 없다. 노래로써나 그려보던 그 금강산이 우리 앞에 성큼 다가선 것도 이런 맥락에서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성급한 사람들은 올 가을 금강산으로 단풍 구경 갈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 모르겠다. 상상은 자유이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을 것이다.

 

 40여 년의 대립과 단절이 하루아침에 이어지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대를 거는 것은, 개방과 화해의 물결 앞에 우리 겨레만이 유달리 억지와 고집과 트집으로 버틸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뜻에서다.

 

 아직도 상호간에 불신과 의혹과 비방으로 얼룩진 분단의 벽은 엄연한데, 곧 통일이라도 될 듯이 들떠서 성급하게 서두는 것은, 정부건 민간이건 또는 언론이건 간에 허약한 우리들의 뿌리를 엿보이게 한다. 세계의 흐름 앞에 끝없는 인내를 가지고 감정보다는 이성으로써 하나하나 꾸준히 헤쳐 나간다면 시절 인연을 따라 마침내 길은 하나로 이어질 것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이 요즘의 우리를 일깨워주고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북쪽으로 향하는 관심보다 자체 안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있다. 지난해 우리는 '과거사'에 매달려 국력을 얼마나 소모해왔는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그동안 부정과 비리를 파헤칠 만큼 파헤쳤으니, 정치권에서는 어물어물 더 미루지 말고 중간 평가를 받건 국민투표로 판가름을 하건 빨리 결단을 내려 새로운 출발이 있어야 한다. 생업게 바쁜 대다수 국민들의 의식을 정치판에 가두어놓치 말아야 한다. 과거 때문에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가 더 이상 시들어서는 안된다.

 

 "과거와 현실이 싸움을 하면 미래가 손해를 본다."고 처칠이 말한 바 있다. 한 나라와 사회의 온갖 잠재력을 과거사에만 집중투자하고 오늘을 허술하게 지나치면, 미래를 위해서는 투자를 할 수 없다. 구질서의 파괴에 보인 그 열기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데에도 지혜롭게 작용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만 살고 말 그런 존재가 아니다. 현재의 우리가 과거의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음덕을 입고 있듯이,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도 현재의 우리는 그 음덕을 쌓아두어야 한다.

 

 

 정부 대변인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우리는 지금 선진국으로 편입되느냐 아니면 그저 그런 나라로 처지고 마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경제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1인당 국민소득 4천 달러가 '마의 문턱' 이라고 한다. 우리보다 훨씬 잘살던 많은 중진국들이 이 마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도중에 꺾여 선진국행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아르헨티나는 2차대전 이전에 이미 제2의 미국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경제적으로 번창한 나라였다. 이런 나라가 그 사회의 정치력과 경제력이 감당해낼 수 없는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되는 바람에 오늘처럼 엄청난 외채 더미에 깔리고 만 것이다. 우리보다 잘살던 브라질, 멕시코 등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지난해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세계를 보는 우리들의 시각은 크게 돌변했다. 외국 하면 곧 미국이 떠오를 만큼 미국이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해왔는데, 지난 가을을 고비로 우리들의 밖으로 향한 눈은 소련과 중국, 동독, 헝가리 쪽으로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인들이 여러 가지로 우리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것은 사실이다. 그 나라는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고 이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이, 말하자면 잡종들이 모여서 사는 나라다. 그리고 나라를 세운 지가 겨우 2백 년밖에 안 됐기 때문에,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철이 덜 든 나라다. 철이 덜 들었기 떄문에 의리와 신의를 저버리기 일쑤고, 함부로 우쭐거리면서 남의 자존심을 건드려놓는 바람에 가는 데마다 달갑잖은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또한 오늘날의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들을 감정만으로만 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 대외무역의 40퍼센트를 미국 시장이 차지하고 있고, 그들과의 무역 거래에서 연간 1백억 달러 가까운 흑자를 보고 있다. 그리고 백만이 훨씬 넘는 동포들이 미 대륙에 가서 살고 있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우리 영토가 미 대륙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현실이기 때문에 그들을 감정적으로만 대할 수 없다. 좋은 시장을, 우리 영토를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금 돈푼으로 만진다고 하니까, 중국, 소련 등 동구권에서 손짓을 하고 있지만, 언제 그들이 우리를 거들떠보기나 했던가. 미국 시장에 비해서 한계적인 잠재력밖에 없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너무 기울어지지 말아야 한다.

 

 온 세계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무역전쟁에서 우방과 적이 따로 없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따라서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엄숙한 과제다.

 

 우리는 지금 정치적 격동과 경제구조의 전환이라는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있다. 일찍이 앓아야 했을 홍역을, 누가 말했듯이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때에 앓고 있는 셈이다. 이 '마의 문턱' 앞에서 우리는 어렵고 가난하게 살던 지난날을 한번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서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민족적인 지혜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 온갖 모순과 갈등으로 얽힌 이 지구상에서 모든 욕구가 어떻게 한꺼번에 다 충족될 수 있겠는가, 도약의 기회는 늘 있는 것이 아니다. 태평양시대의 상승 기류 없이 우리 단독으로 날아오르기는 어렵다.

 

 이제는 그만 묵은 수렁에서 헤쳐 나와 드넓은 바다로 뛰어들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의 봄은 이 '문턱'을 넘는 봄이 되어야 한다. 1989

 

-텅빈충만 - (51) '마의 문턱' 앞에서....................P341~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