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충만 - (49) 새해는 올 것인가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의 한 자락이 또 지나가버렸다. 마치 움켜쥐었던 모래알이 술술 빠져 나가듯이 세월은 그렇게 새어나간다.
돌아볼 것도 없이, 지나간 한 해는 우리 모두에게 이 땅에서 일찍이 없었던 일들을 보고 듣고 또한 느끼게 했다. 그리고 여느때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것 같은 인간관계와 덧없음의 우주 질서가 확연히 드러난 그런 해이기도 했다.
국회가 무슨 일을 하는 기관인지, 거기 모인 사람들의 자질이 어떤지, 그리고 각 정당이 무슨 빛깔을 띠고 있는지를 이제는 한 눈에 환히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지나온 8년 동안 우리가 어떤 세상을 살아왔는지, 말짱한 눈과 귀와 입을 가지고도 알 수 없었던 허다한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우리들을 어처구니 없게 만들었다. 가려졌던 사실들이 하나하나 드러날 때마다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에 앞서 우리들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허탈감까지 갖게 되었다.
솔직한 내 심경으로는, 지난 한 해는 마치 무엇에 체한 것 같은, 우리 국민 모두가 8년이나 묵은 악몽과 체증에 걸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러니까 1988년은 '현재'는 없이 과거에만 매달려 살아온 것 같다는 말이다.
물론, 현재란 과거의 연장이고 미래 또한 현재의 연장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지난 한 해는 현재가 과거의 더미에 깔려 희미해지고 기를 펴지 못한 그런 나날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털어놓는다면 불쾌했던 일들은 될 수 있으면 빨리 지나쳐버리려고 한다. 불쾌한 일들에 천착하면 현재의 삶에까지 그 불쾌감이 묻어오기 때문이다. 일을 통해서나 사람을 통해서나 현재의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을 떄, 좀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가치 부여를 할 수 없을 때 나는 선뜻 털고 일어선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일단 지나가버린 일들에 매달리면 현재의 삶이 소홀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결과적으로 내게 이중의 피해를 가져오게 된다. 나는 오늘을 살고 싶다. 현재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고 싶다.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지금 이자리에서 이렇게 산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고, 아직 오지도 않은 불확실한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다. 언제 어디서건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일야현자경>이란 경전이 대장경 속에 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과거를 따르지 말라. 미래를 바라지 말라. 한번 지나가버린것은 이미 버려진 것, 그리고 미래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 당면한 현재의 일들을 자신의 처지에서 잘 살펴 흔들림 없이 바르게 판단하라. 그리고 그 경지를 더욱 넓히라.
다만. 오늘 해야 할 일에 전력을 기울이라. 누가 내일에 죽음이 있을지 알 수 있는가…."
5공 비리와 광주 문제 등은 그동안의 국회 청문회를 통해서 그 실상과 윤곽이 거의 드러난 셈이다. 기억이 나지 않느니, 나로서는 모르는 일이니 하면서 발뺌들을 하고 있지만 사건의 배후와 그 책임 소재는 어느 정도 밝혀질 만큼 밝혀졌다. 우리가 개탄해 마지않는 것은 그토록 끔찍하고 엄청난 살육과 부정을 저지르고 나서도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책임 질 줄 모르는 정치란 무엇인가.
이제는 정치권과 관계 당국에 의한 그 뒤처리가 주목될 뿐이다. 우리들 국민의 입장에서도 이런 일들은 어물어물 넘기려 하거나 질질 끌지 말고 하루빨리 명쾌하게 매듭지어졌으면 한다. 우리들의 맑은 의식을, 불쾌하고 끔찍한 그런 일들에서 어서 풀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인간의 삶이 어디 정치뿐인가. 우리들이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즐겁고 보람 있는 영역은 얼마든지 있다. 무고한 국민들을 어둡던 정치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현재의 정치권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해야 할 일도 많고 세상살이에 힘이 겨운데, 시끄러운 정치로써 무고한 국민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 땅에서 정치다운 정치가 사라진 지 오래이기 때문에 정치가 온 국민의 지대한 관심거리이긴 하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달라져가고 있으니 정치 문제는 정치를 업으로 하는 정치인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그 잘잘못은 우리가 기억해두었다가 다음 선거 때 투표로써 갚아주면 된다.
우리 관용어에 '어지간이 해두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속에는 우리 국민의 모질지 못한 덕성이 들어 있다. 물론 시안에 따라 밝일 것은 철저히 밝혀야겠지만, 더 밝히지 않아도 뻔한 일을 가지고 끝까지 물로 늘어지려는 것은 '싹쓸이' 하겠다는 것만큼이나 섬뜩하고 독기가 서려 있는 생각이다. 철저히 밝힐 줄은 알면서도 어지간히 해두자는 우리 전래의 덕성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세상일이란 눈에 보이는 부분만이 전부가 아니다. 물리적인 또는 사법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이 뿌린 씨앗은 그 자신이 언젠가 스스로 거두게 마련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섭리이고 우주 질서다. 세상에 완전 범죄란 존재할 수 없다는것도 바로 이런 도리에서다.
우리에게도 '새해'가 올 것인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달력만 바뀌었다고 해서 새해일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의식과 행동양식이 묵은 수렁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새해에 이를 것이다.
악몽은 짧을수록 좋다. 과거를 샅샅이 캔다고 해서 아픈 상처가 근원적으로 치유될 수는 없다. 우리가 어제에만 매달린 사이에 오늘의 현장에서는 온갖 도둑들이 설치고 백주에 납치와 인신매매까지 성행하게 되었다. 이런 일은 또 누구의 책임인가. 나라와 겨레의 처지에서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에게 제발 '새해'가 왔으면 좋겠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이제는 보다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일에 관심을 두고 정열을 쏟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진정으로 선진의 대열에 끼려면, 우리들의 의식부터 묵은 수령에서 벗어나 탄탄한 대지를 마음껏 활보할 수 있어야 한다.
묵은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그리고 비정한 국제사회에서 뒤지지 않으려면, 지난 일은 어지간히 해두고 앞을 보고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1988
-텅빈충만 - (49) 새해는 올 것인가...............P33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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