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충만 - (45) 색을 감정으로 내뿜지 말라
1971년 이후, 그러니까 16년 만에 우리가 우리 뜻으로 직접 나라를 맡아 다스릴 대통령을 뽑게 된 감회가 실로 무량하다. 이번 대권에 도전한 후보들의 감회에 못지않게 유권자의 처지에서도 대통령 직접선거를 맞는 감회가 그지없다.
후보자들마다 내세우는 선거 공약을 듣고 있노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우리는 앞으로 아무 걱정 없이 잘살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선거철의 공약이 말처럼 제대로 실천되지 않고 허황한 빈말로 그치는 수가 흔히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듣는 소리이기 때문에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란 말이 생각나는 것이다. 선거철이 아니라면 이토록 눈부신 이 땅의 미래상을 어디서 들어볼 수 있겠는가.
지난 6월 이전의 암담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수없이 찢기고 상한 외로운 젊음들의 넋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민주화에 대한 온 겨레의 열망과 기대가 요 며칠 사이 선거 유세장에서 빚어진 폭력과 무질서로 인해 커다란 상처를 입고 있다. 광주와 대구, 그리고 부산에서 일어난 그 폭력과 무질서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지 난감하다. 우발적인 사건이 됐건, 치밀하게 계산된 배후 조종에 의해서였건간에 민주화의 길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작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어느 쪽도 득이 될 수 없는 비열한 짓이다.
우리는 43년 동안 남북으로 분단된 채 이념을 내세워 극한적인 대치로 남쪽이나 북쪽이 똑같이 민족의 저력을 부질없이 탕진해 오고 있다. 생각할수록 통탄할 겨레의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분단 자체만 가지고도 억울하고 분한데, 남쪽이나 북쪽이 분단을 체제 유지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음을 볼 때, 체제 그 자체에 회의를 갖게까지 한다.
또 이번 선거를 통해 지역 감정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두 동강난 반쪽에서 경상도다 전라도다 해서 다시 동·서로 맞서려는 것이다. 지역 감정의 뿌리를 캔다면, 멀리는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한 겨레인 백제를 멸망시킨 데서부터 비롯되겠지만, 우리 시대에 와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치우친 인재등용과 지역간의 균형 발전을 생각하지 않고 특정 지역만을 집중 개발, 육성한 데서 생긴 것 같다. 더구나 1971년 대통령선거때 지원 유세에 나선 정계의 일부 인사들이 지역 감정을 노골적으로 부채질한 데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방색과 지역 감정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지방색은 그 지역의 특성이기 때문에 넓게 보면 우리 한국인의 특성을 이루는 인자가 될 수 있다. 그 지방마다 자연환경과 사회여건에서 오는 특색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한 특색은 조장하고 육성할지언정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기 고향에 대한 애착을 갖는 애향심도 바람직한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지방색을 지역 감정으로 분출하는 일이다. 애향심이나 그 지방 특색의 차원을 넘어, 감정을 가지고 극단적인 쪽으로 치달으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며 비이성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 감정적인 사람은 자기 생각이 호응을 받지 못하거나 출구를 찾지 못하면 공격적이고 잔인해질 수 있기에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감정적인 사람은 자신에게 거슬리는 자극을 받으면 증오와 파괴와 살육도 자행할 수 있다. 엊그제 선거유세장에서 빚어진 폭력과 무질서가 바로 그런 비이성적인 감정에서 유발된 작태 아니겠는가.
지역 감정의 유발은 누구보다도 과거와 현재의 정치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 후보마다 지역 감정을 해소하자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제 행동을 보면 그 지역 감정을 득표와 연결시키고 있다. 설사 지역 감정을 이용하여 대권을 잡았다 할지라도 그 후에 올 사태를 예상한다면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인류 사회의 근원적인 평화는 정치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인류 역사가 그대로 증명하고 있는 바다. 왜냐하면 정치에는 항상 자파 중심적인 이해관계가 끼어들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지금보다 덜 무자비하고 덜 고통스럽고 덜 미워하면서 이웃끼리 믿고 살 수 있는 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부드럽고 밝은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돼야 한다. 유권자의 현명한 판단과 선택이 우리 시대 역사의 향방을 가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종교계 일각에서도 지금 분파주의의 바람이 일고 있다. 특정 후보 당선을 위한 기원법회가 있는가 하면, 어떤 후보는 자기가 당선되면 이 땅을 특정 종교의 천국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종교가 정치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영원을 지향하는 종교 집단이 이해관계에 얽힌 현실 정치의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청정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들은 종파적인 편견에서 벗어나 그 어떤 소리에도 현혹됨이 없이 이 나라를 위해 국민적인 양식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이 나라는 불교 국가도 아니고 기독교 국가도 아니다. 또한 그렇게 되어서도 안되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종교가 정치와 야합하면 썩는다는 역사적인 교훈을 거듭 상기하기 바란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동서로 갈라지고 그 위에 종파끼리 갈라져 대립한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분파주의는 나라와 겨레를 망치는 암적인 요소임을 현명한 신앙인은 명심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민주화를 위해 진정한 의미의 선거혁명을 이루려면, 한때의 감정적인 치우침이나 휩쓸림이 아닌, 냉정한 이성의 판단과 선택이 있어야 한다. 지역적인 감정에다 종교적인 감정마저 곁들인 분파주의에 우리들이 놀아난다면 16년 만에 어렵게 되찾은 선택의 권리를 무가치하게 스스로 박차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유세장의 폭력과 무질서를 보고 세계 시민들은 우리를 뭐라고 할 것인지 우울하고 우울하다. 앞으로 또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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