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충만 - (43) 가을이 온다
지난 여름은 우리 모두에게 전에 없던 격동과 시련과 기대를 안겨준, 그래서 열기로 가득한 그런 시절이었다. 들녘에 나가 가을바람에 여물어가는 벼이삭을 보고 있으면, 갖은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묵묵히 가꾸어온 농부들의 노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한 톨의 이삭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태풍으로 무너진 논둑을 다시 쌓고, 쓰러진 벼포기를 일으켜 세우느라고 횃불을 들고 밤을 새워가며 일하던 모습들이 거룩한 성상처럼 떠오른다. 말없이 대지를 경작하는 이런 농부들이야말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요 위대한 창조주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한때 우리가 지녔던 그 희망과 기대가 자꾸만 희석되려고 한다. 계층간의 주장들이 이제는 이성과 양식의 선을 넘어 격앙된 감정과 살벌한 흥분으로 치닫고 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처럼 멈출 줄도 모르고 어디론지 곤두박질치는 것만 같다.
이런 결과는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묻지 않아도 우리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과거의 쓰라린 경험으로 보아 억압과 통제와 비인간적인 횡포가 우리들 목을 죄고, 우리 시대를 다시 멍들게 할 것이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 외곬의 일부 계층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은 오늘 이 땅에서 혁명을 절대로 원치 않는다. 혁명은 새로운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의 되풀이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엎어지는 혁명이 아니라 건전한 개혁을 우리는 원하고 있다.
개혁은 하나하나 점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한꺼번에 당장 이루어질 수는 없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받아내려고 한다면, 궁지에 몰린 나머지 칼자루를 쥔 쪽에서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 쉽다. 왜냐하면 내놓은 고지에 대해서는 늘 연연하게 마련이니까.
엊그제 만난 몇몇 근로자들에게도 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제는 온 사회가 주시하고 있는 가운데서 한 가지씩 개선의 싹이 트고 있으니 너무 성급하게 서둘지 말자. 그리고 노사간에 서로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여유도 가지면서 내 집안일처럼 차근차근 타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받아내려고 하다가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면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제발 때려부수고 불지르는 일만은 참으라고 당부했다.
가난한 나라 살림에 천재지변으로 입는 피해도 막중한데, 우리 손으로 때려부수고 불질러 득될 게 뭣인가. 일단 파괴에 손을 대면 재산상의 피해는 놓아두고라도 인간의 심성이 그만큼 찢기고 상한다는 업연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파괴의 손으로 어떻게 내 아내와 자식을 다독거리고 가정에 온기를 가져올 수 있단 말인가.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런 파괴와 방화 앞에 누구나 섬뜩해 하고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약자인 근로자들에게 동정과 이해를 보내던 이웃들도 하루아침에 차디찬 눈으로 바뀌고 말 거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기업주는 더 이상 미적미적 미루면서 맨 처음의 약속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기업의 손익에 대한 내용을 전 종업원들에게 정직하게 공개하여 합당한 요구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일을 풀어가는 데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어쨋든, 한국 경제가 그동안 급성장한 이면에는 정책 당국의 비호 아래 값싼 노동시장 덕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훤히 알고 있는 이 마당에, 뒤늦게라도 응분의 보상을 치르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세상에 거저 되는 일도 없을 뿐더러 공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런 기회에 우리 모두가 깨우쳤으면 좋겠다.
6·25 선언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나라를 사랑하고 이 겨레의 앞날을 염려한 젊은 대학생들의 의로운 투쟁의 산물이다. 자기 희생을 각오한 그 젊음들이 아니었다면, 정치 군인들의 독선적인 행진은 결코 그 방향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학생들이 있기에 이 나라의 미래는 희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의로운 투쟁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시기를 가려야 한다. 아무 때고 전천후식으로 일어선다면 그때는 이미 명분과 의미를 잃게 된다. 집 안에 불이 나면 소방관만이 불을 끄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다 나와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 하지만 일단 불이 잡히면 저마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하는 것이 또한 건전한 사회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국민 대다수는 혁명을 원하지 않고 건전한 개혁을 갈망하고 있다. 우리 대학생들의 애국심과 용기와 잠재력은 지난 여름, 세계가 다 같이 확인했었다. 6·25 선언이 어떻게 이행되는지, 여·야의 정치인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요리하는지 지켜보면서, 이제는 대학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가는 것이지 결코 오는 것이 아니다. 한번 흘려보내고 나면 다시 되찾을 수 없다. 눈이 맑을 때 실컷 배워두기를, 젊음이 머무는 동안 괴로워하며 탐구하기를 권하고 싶다.
이 나라는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할 나라이지 어떤 계층만의 것이 아니다. 한쪽으로만 몰고 가려고 하지 말라. 모두가 지나가는 한때일 뿐이다. 그리고 어떤 일에나 너무 집착하지 말라. 너무 집착하면 시야가 좁아진다. 세상은 넓다. 열린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라. 어디에고 얽매이지 말라. 어떤 일만을 최고 가치고 삼을 경우, 우리는 그 일의 노예가 되어 팔팔해야 할 사람이 시든다.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들녘에 나가 누렇게 물든 이삭들을 보라. 지난 여름 갖은 재난 속에서도 알알이 가꾸어온 우리 농부들의 피땀을 보라. 이 땅의 농부들이야말로 노력에 비해 소득이 가장 미약한 억울한 이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이 없다. 입이 없어서가 아니라, 흙을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계절의 질서 안에서 참고 기다릴 줄을 안다. 흙에는 거짓이 없다. 가꾼 대로 거두게 한다. 오늘의 온갖 갈등은 이 흙의 정신을 본받을 때 그 길이 열릴 것이다.
가을이 온다. 당신은 이 가을에 무엇을 거둘 것인가. 1987
-텅빈충만 - (43) 가을이 온다..........................P301~305
'▒▒▒마음의산책 ▒ > 법정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텅빈충만 - (45) 색을 감정으로 내뿜지 말라 (0) | 2017.07.24 |
---|---|
텅빈충만 - (44) 달빛처럼 푸근하게 (0) | 2017.07.23 |
텅빈충만 - (42)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0) | 2017.07.21 |
텅빈충만 - (41) 휴가철에 만난 사람들 (0) | 2017.07.19 |
텅빈충만 - (40) 끊임없는 정진 (0) | 2017.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