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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충만 - (37) 평생의 양식

나무향(그린) 2017. 7. 15. 06:06

텅빈충만 - (37) 평생의 양식

 

1

힌두교의 전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 세상이 맨처음 이루어졌을 때는 사람도 신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신적인 능력을 아무 데나 함부로 남용했기 때문에 신들의 노여움을 샀다. 신들 중에는 가장 우두머리 격인 범천왕梵天王은 마침내 인간들한테서 신의 능력과 자격을 박탈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인간들 한테서 회수한 그 신성을 어디에다 숨겨두느냐가 문제였다. 그래서 인간을 제외한 모든 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대책을 의논했다.

 

 어떤 신들은 그것을 지구의 저 밑바닥에 깊숙이 숨겨놓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범천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그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인간들은 지구의 밑바닥쯤은 문제없이 파고들어가 언젠가ㅡㄴ 그것을 도로 찾아내고야 말 거라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이번에는 가장 깊은 바다 밑에 숨겨두자는 의견이 나왔다. 범천왕은 이 의견에도 찬성할 수 없었다. 이유는 아무리 깊고 깊은 바다 밑이라 할지라도 영악한 인간들은 결국 그 속으로 뛰어드는 방법을 배워서, 바다 밑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것을 찾아내고야 말 거라는 것이다.

 

 그러자 한 신은, 짐승도 올라갈 수 없는 가장 높은 산의 벼랑꼭대기에  숨기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 아니냐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번에도 범천왕은 그 제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인간들은 지구의 높은 산이란 산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조리 다 기어올라갈 것이고, 벼랑 꼭대기까지 올라가 끝내는 그것을 찾아내어 다시 그들이 신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범천왕은 그 반대 이유를 내세웠다.

 

 회의에 참석한 여러 신들은 지구든 바다든 그 어디에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을 만한 곳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신성을 숨길 만한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거듭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때 깊은 생각에 잠겼던 범천왕이 목청을 가다듬고 말문을 열었다. 인간의 신성을 숨기려면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인간 그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어느 곳에 숨겨두는 것이다. 설마 거기까지야 그들의 생각이 미치겠느냐는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들은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찾아 산에 오르고 땅을 파 뒤지며 바닷속에 뛰어들기도 하면서 온 지구를 샅샅이 헤매며 끝없는 탐험과 탐색을 계속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 헤매고 그 무엇이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밖으로 밖으로만 끝없이 찾아 헤매는 것이다.

 

 신화적인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는 내용이다.

 

 

2

 선종의 역사서인<조당집>과 <마조어록>에서 대매 화상에 대한 이야기를 추려본다.

 

 화상의 호는 법상이며, 일찍이 형주의 옥천사에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20세 때 용홍사에서 구족계(비구계)를 받았다. 온갖 아는 것이 말재주에는 보탬이 될지 몰라도 마음을 깨닫는 일에는 도리어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선지식을 찾아 여기 저기 다니면서 도를 묻고 배우다가 강서의 마조 스님 회상으로 찾아간다.

 

 처음으로 마조 스님을 친견하고 나서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조 스님이 대답했다.

 

 "그대의 마음이 바로 부처니라."

 

 이 말에 법상은 문득 깨달았다.

 

 "어떻게 지녀야겠습니까?"

 

 "그대가 잘 보호해 가지라."

 

 다시 물었다

 

 "법이란 무엇입니까?"

 

 마조께서 대답했다.

 

 "역시 그대의 마음이니라."

 

 또 물었다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이 땅에 오신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의 마음이 그것이니라. 그대가 그 마음을 알기만 하면 모든 것은 바로 거기에 있느니라."

 

 법상은 그 길로 행각의 길을 떠나 대매산에 이르자 거기 머물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때 약간의 곡식 종자를 구해 가지고 한번 깊은 산으로 들어간 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확신한 그는 다시 더 묻고 배울 것이 없어졌다. 그저 이 마음을 살피고 쓸 줄 알면 그것으로 족했다.

즉심즉불 이라고 한 마조 스님의 이 한마디가 그의 생을 바꾸어놓고 또한 삶의알맹이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우리는 여기저기서 골백번도 더 들어왔다. 그러면서도 다시 마음을 찾고 부처를 찾는 것은 이 무슨 까닭인가? 확신이 없는 말은 한낱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일뿐 영혼을 울려주지 못한다. 영혼에 울림이 없으면 삶이 개조될수 없다.

 

 이 마음이 부처일 뿐 아니라, 이 마음이 또한 법이고, 달마 스님이 멀리서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이 땅에까지 오신 뜻도 바로 이 마음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법은 마음밖에서 찾으면 헛일이라는 것이다. 시작도 이 마음이고 끝도 이 마음이다. 사는 것도 이 마음이 살고 죽음 또한 이 마음의 일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염관 제안 문하의 한 스님이 산에서 주장자감을 찾아다니다가 길을 잃고 헤맨 끝에 우연히 한 초막에 이른다. 문득 초막 안을 들여다보니, 풀잎을 엮어 만든 옷에 머리는 뒤에서 하나로 모아 묶은 행색의 한 사내가 거기 있었다. 갑작스런 방문객을 보자 초막 안의 사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런 깊은 산속에서 홀로 사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말했다.

 

 "마조 스님을 뵈었기 때문이네."

 

 방문객이 다시 물었다.

 

 "여기서 산 지가 몇 해나 되었습니까?"

 

 "몇 해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다만 둘레의 산빛이 푸르렀다가 누래지고 다시 푸르렀다가 누래지는 것만을 보아왔을 뿐이네. 이렇게 거듭하기 한 30여 차례나 되었을까...."

 

 길을 잃고 헤매던 방문객이 다시 물었다.

 

 "마조 스님 밑에서 어떤 법을 얻으셨습니까?"

 

 "마음이 곧 부처!"

 

 그가 하산하는 길을 묻자 골자기의 물을 따라서 내려가라고 일러주었다.

 

 

3.

 그 스님은 무사히 산에서 돌아오자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염관에게 낱낱이 이야기했다. 염관이 말했다.

 

 "내가 기억하건대 강서(마조 스님의 문하)에 있을 떄 보니, 어떤 스님이 마조 대사에게 부처와 법과 달마 조사의 뜻을 물었다. 대사께서 대답하기를, '그대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니라.' 고 하셨는데, 그 뒤로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스님의 행방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 혹시 그 사람이 아닐까?"

 

 몇 사람의 제자를 불러 앞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산에 들어가 그를 만나게 되면 "마조 대사께서는 요즘 비심비불(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이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윽고 그들은 대매산으로 법상을 찾아가 염관이 미리 일러준대로 말했다.

 

 "요즘에 와서 마조 스님의 말씀이 좀 달라지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비심비불이라고 하십니다."

 

 법상은 내뱉듯 말했다.

 

 "그 늙은이가 사람을 햇갈리게 하는군. 그가 비록 그렇게 말한다 할지라도 나는 오로지 즉심즉불일 뿐이야!"

 

 염관이 이 말을 전해 듣고 찬탄하였다.

 

 "서산의 매실이 익었으니, 그대들은 가서 마음대로 따먹으라.

"

 이때의 일을 마조 대사께서도 전해 듣고 이와 같이 말했다.

 

 "매실이 다 익었구나!"

 

 이런 일이 있은 지 2,3년도 안 되어 대매산의 대중이 수백 명에 이르렀고, 남자들을 맞이하는데 대답하는 말씀이 흐르는 물처럼 막힘이 없었다고 한다.

 한마디의 가르침으로 평생의 양식을 삼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이다. 우리들은 그 많은 책과 법문과 화두와 스승을 거치면서 그 무엇을 배워왔는지, 한번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허구한 날 무엇을 찾아 어디로 헤매고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이 진실이라면, 딴 데서 이 마음과 부처를 찾으려는 것은 헛일이다. 이 마음으로 순간순간 살아가는 일이 곧 부처의 삶이고 보살의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막연하게 '부처'나 '깨달음' 에 갇혀서 지금 당장의 마음씀에 소홀해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한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한다.

부처나 마음이 살아서 현실에 작용하지 못하고 관념화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우상이 된다.

 

 지금 당장의 삶과 가장 가까운 종교가 진정한 종교다. '바로 지금 이자리' 를 떠난 종교는 사이비이고 흑세무민하는 사기집단이다.

 

 부처나 깨달음은 차치하고 '마음' 그 자체에도 매이지 않는 그것이 우리들의 '본래 모습' 아닌가.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지도 잊지도 말아야 한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건, 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확신 속에 평생을 살았던 대매산의 법상 화상, 그런 믿음을 지닌 사람만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본래 보습을 남김없이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1989

 

-텅빈충만 - (37) 평생의 양식..............P260~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