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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충만 - (35) 큰 웃음소리

나무향(그린) 2017. 7. 13. 15:37

텅빈충만 - (35) 큰 웃음소리

 

1

요즘 국회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인간사의 이모저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막강한 권력을 쥐고 또는 그 그늘 아래서 이 땅의 무고한 시민들을 호령하고 괴롭히고 때로는 기만하던 그들이 증언석에 나와 심문을 받고 있는 광경을 볼 때 권세의 무상함을 거듭 실감하게 된다. 권불십년權不十年, 아무리 기세등등한 권세라 할지라도 십 년을 가지 못한다는 옛말에 수긍을 한다.

 

 광주특위 청문회에 나온 그 시절의 계엄사령관과 국방부 장관의 증언을 들으면서, 우리는 한결같이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궁지에 몰리면, 자기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거나 기억이 안 난다고 얼버무리기가 일쑤였다.

 

 수백 명의 귀중한 생명들이 자기의 지휘 감독 아래 무참히 희생을 당했는데도 국민 앞에 전혀 사죄할 줄도 뉘우침도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끔찍한 살육 앞에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말이 되는가. 그때의 계엄사령관이나 국방부 장관은 어쩌면 살권이 없이 배후의 조종을 받은 '허수아비들' 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생을 군인으로, 그것도 아무나 달 수 없는 별을 네 개씩이나 달고 행세하던 장성들인데, 군인다운 기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요람인 육군사관학교의 신조는 지智와 덕德과 용勇이라고 들었는데, 그 어느 한가지도 그들은 갖추고 있지 못한것 같다. 그들은 너무 무기력하고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책임질 줄 모르는 비겁한 졸장부들인가 싶으니, 국토 방위의 실상과 그 아래 장졸들의 사기며 기상까지도 새삼스레 염려가 된다.

 

 광주 학살의 만행에 대한 당사자들의 증언을 온 국민이 일손을 놓은 채 촉각을 세우고 듣고 있는데 그들의 증언은 시종일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뭐라 얼버무리거나 뚱딴지 같은 소리만 늘어놓았다.

 

 야당의 심문자 한 사람이 그 시절의 국방부 장관에게 시간이 없으니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대답만 간단히 하라고 주의를 주면서 물어 나가자 증인석에서 "아니고"하는 대답을 하여 장내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또 "증인은 남한테 잘 속지요?"하고 묻자 "나는 잘 속지 않습니다." 하는 말에 또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잔뜩 긴장들을 하던 판에 웃음이 터져나오니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그렇다, 학살의 진상을 밝히려는 이 청문회가 웃을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끼리 주고받는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한 긴장만으로 채워진다면 너무도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

 

 뚱딴지 같은 소리라 할지라도 그로 인해서 우리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한 줄기 시원한 바람과 같다. 웃고 나서는 긴장감이 훨씬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웃음이란 이와같이 윤활유 역활을 하는 모양이다.

 

2

약산유엄(745~828)은 17세에 출가하여 27세에 형악의 회조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어느 날 아침 그(양산)는 말했다.

 

 "대장부가 마땅히 법을 떠나 스스로를 밝힐 것이지 어찌 좀스럽게 형식적인 예법에 얽매이겠는가?"

 

 그 길로 그는 석두 회천 선사를 찾아가 그 문하에게 부지런히 선을 수행한 끝에 크게 깨달았다.

 

 하루는 약산이 좌선을 하고 있는데 스승(석두)이 와서 물었다.

 

 "그대는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일없이 그저 앉아 있단 말인가?"

 

 "일없이 앉아 있다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됩니다."

 

스승은 그를 더욱 몰아세웠다.

 

 그대는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 했는데, 그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신랄한 추궁에 약산은 태연히 대답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천 사람의 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스승은 계송으로 그를 칭찮했다.

 

 

     본래부터 함께 살면서도 그 이름 모르고

     되는 대로 어울려 그저 그렇게 지낼 뿐

     예전의 성인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범부들이 밝힐 수 있으랴.

 

 스님은 그 후 예주의 유악산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약산 화상이라 부르게 되었다.

 

 낭주의 주지사 이고가 일찍부터 스님의 명성을 듣고 몇 번인가 초대를 했지만 스님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이고 쪽에서 몸소 약산에 올라와 스님을 뵈려고 했다.

 

 주지사가 뵈러 왔다는 전갈을 받고도 스님은 못 들은 체 경만 보고 있었다.

 

 시자가 가까이 와서, 거듭 알렸다.

 

 "스님, 지사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고는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스님의 반응을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이렇게 내뱉았다.

 

 "막상 와서 보니 천리 밖의 소문만 못하구나!"

 

 이때 비로소 스님은 지사를 불렀다.

 

 "이 지사!"

 

 "예?"

 

 "어째서 그대는 귀만 소중히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는고?"

 

 이고는 이때 스님에게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스님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물병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알겠는가?"

 

 이고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네."

 

 이 지사는 알아차린 바가 있어 스님께 절을 한 뒤 다음과 같은 계송을 읊어 찬탄했다.

 

 

     수행하신 그 모습 마치 학과 같은데

     천 그루 솔밭 속에 두어 함의 경천

     도룰 물으니 다른 말씀 없으시고

     구름은 하늘에 물은 병에 있다 하시네.

 

 

 그렇다. 구름은 하늘에 떠 있고 물은 병안에 들어 있다. 법(진리)은 마땅히 있을 곳에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특별한 데만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일상생활을 떠나 따로 진리가 있지 않다는 말이다. 종교가 혹은 신앙생활이 순간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그 속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나 절 안에만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나 절은 어떤 의미에서 틀에 박힌 혹은 꺼풀만 남은 종교이기 십상이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와 절은 진실한 수행보다는 상업주의에 거의 오염되어 가고 있는 현실도 직시할 줄 알아야 한다.

 

 진리를 마음밖에서 찾지 말라 한 것도, 일상적인 무심한 마음이 곧 도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임을 알아야 한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약산 스님은 산 위에 올라가 어슬렁어슬렁 거닐고 있었다. 문득 구름이 열리면서 그 사이로 둥근 보름달이 환히 그 얼굴을 드러냈다.

 

 이때 스님은 온 산골짝에 메아리가 울릴 만큼 크게 웃었다. 산위에서 거닐다가 달을 보고 한바탕 크게 웃는 노스님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한 폭의 호쾌한 그림처럼 여겨진다. 중국의 현대화가 장대천張大川이 수묵발채水墨潑彩로 그린 <여산도>를 대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이날 밤 약산의 한바탕 큰 웃음소리는 동쪽 90리 밖에 있는 예주에까지 울려 퍼졌다고 선종의 역사서인<조당집>에는 기록되어 있다. 예주 사람들은 모두 바로 자기네 이웃집에서 웃음소리가 들린 것으로 알았다. 한 집 두 집 알아본 끝에 약산에까지 이르렀는데, 스님들이 말하기를 " 지난밤에 노스님께서 산위에 올라가 크게 웃으시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고는 시를 지어 스님께 보내드렸다.

 

 

     그윽한 거처에 소탈한 뜻 맞았는지

     한 해가 다하도록 맞고 보낼 일 없네

     때로는 곧바로 외로운 산정에 올라

     달 아래 구른 헤치고 한바탕 웃으셨네.

 

 

 호쾌한 웃음소리를 들은 지 언제인가. 오늘날 우리 곁에는 그런 웃음소리가 귀하다. 살기에 쫓기고 지쳐서 웃음을 잃어가고 있다. 시름에 겨울수록 사람은 웃을 줄 알아야 한다. 웃어야 닫힌 마음이 열리고 막혔던 일이 술술 풀린다. 겹겹우로 싸인 어둡고 답답한 벽들이 허물어진다.

 

 땅을 울리고 하늘에 메아리치는 그런 호쾌한 장대한 웃음이 인류의 미래를 밝게 열어줄 것이다.

 

 근심 걱정에 싸여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이웃들이여, 굳이 산꼭대기가 아니라도 친구를 만나 한바탕 실컷 웃어보라. 그러면 모든 일에 훨씬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1988

 

 

-텅빈충만 - (35) 큰 웃음소리..............P246~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