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충만 - (33) 사막의 교부들
1
지난번 왜관 김상진 신부님이 산을 다녀가면서 주고 간 두 권의 책 중에서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을 요 며칠 동안 읽었다. 같은 수행자라는 처지가 아니더라도 투철하고 준엄한 사막 교부들의 그 구도정신에 큰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내 자신이 출가 수행자의 이름을 빌려 어떻게 살았는가를 돌이켜볼 때 크게 부끄러웠다.
사막의 교부들이란, 2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사막에서 일생을 건 수도생활로 하느님의 길을 걸어간 초기 수도자들을 통틀어 일컽는 명칭이다. 그들의 생활환경이 그토록 척박한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외적인 요인은,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데에 있었다. 박해로 인해 사막의 수도생활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 박해의 종식과 함께 수도생활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의 선종사禪宗史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불교 교단이 국가 권력에 의해 혹심한 법난法難(박해)을 당할때 왕권의 비호를 받던 교종敎宗은 지리멸렬하게 되지만,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맑고 꿋꿋하게 구도자의 삶을 지키며 민중과 함께하던 선종禪宗은 그 잠재력을 기량껏 발휘하면서 크게 번창하기에 이른다.
국가 권력의 비호를 받아야 기를 펴고 박해 아래서는 찍소리 못하고 주저앉고 마는 그런 종교는 온전한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짓밟힐수록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는 잔디와 같은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종교야말로 인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건강한 종교가 될 것이다.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에는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너무도 우직하고 고집 불통이고 기이한 일화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지만, 그 일화들의 행간을 통해 우리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꿋꿋한 구도자의 자세와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또한 오늘 우리들 모습을 비쳐볼 수 있는 맑은 거울이기도 하다.
스케테의 수도자들은 그들의 어떤 덕행이 누군가에게 들키면, 즉 그들이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를 누군가가 알게 되면,그 일을 더는 덕행으로 보지 않고 죄악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그들의 결백성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다. 요즘의 우리들은 자신이 행한 일보다도 더 명성을 드러내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보아야한다.
한 교부가 어느 원로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사부님, 제게 한 말씀 해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제가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네 영혼을 구하고 싶으면 누군가를 찾아갔을 때, 그가 자네에게 묻기 전에는 먼저 말을 꺼내지 말게."
침묵이 구원의 길에 어떤 몫을 하고 있는지를 넌지시 깨우쳐 주고 있다. 그들은 맹목적으로 침묵만을 고수했던 것이 아니다. 침묵의 상대적인 의미도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침묵을 지키지만 마음속으로는 남들을 꾸짖는다. 즉, 쉼없이 지껄이고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말을 하지만 침묵을 지킨다. 필요 없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2
한 교부가 말했다.
"만약 수도자가 두 가지 것을 싫어한다면 그는 이 세상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한 수사가 물었다.
"그게 무언데요?"
교부는 대답했다.
"안락과 허영심이라네."
수도자에게 있어 이 안락과 허영심은 정신을 좀먹는 암이다.
그저 편하기만을 원한다면 그는 갇힌 물이나 다름이 없어, 그 안락 때문에 마침내 썩고 만다. 살아 있는 생명은 늘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살아 움직이며 존재만이 거듭거듭 자신의 삶을 개조 하면서 부활한다.
허영심과 허세는 실이 없는 겉치레, 세속을 등지고 나온 수도자가 다시 세속적인 허영심과 허세를 부린다는 것은 아직도 세속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 떄문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수도자가 나설 자리인지 나서서는 안 될 자리인지를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설치며 주책을 떤다.
어떤 교부는 이 세상을 하직할 때 그를 돌보던 한 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사막에 와서 손수 독방을 짓고 그 안에서 살기 시작한 날부터 내 손으로 일해서 구하지 않은 빵을 먹은 기억이 없고, 했던 말을 지금껏 후회한 적도 없네. 그러나 이제 주님께로 막 떠나려 하니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을 숫제 시작도 하지 않은 느낌이네."
가난과 겸손을 평생 닦아온 수도자가 마지막 목숨을 거두는 순간에 와서, 하느님께 봉사하는 일을 숫제 시작도 하지 않은 느낌이라니, 그런 마음이야말로 겸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람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고,한 교부는 말하고 있다.
안토니오 교부는 하느님의 심오한 생각을데 대해 깊이 탐구해보다가 이렇게 여쭈었다.
"주여, 어떤 사람들은 아주 늙도록 오래오래 사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젊어서 일찍 죽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좋은 것을 넘치도록 많이 소유하고 있는데,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어째서 악한 자들은 부자로 살고, 착한 사람은 가난에 짓눌려 지내야 합니까?"
허공에서 한 목소리가 그에게 대답했다.
"안토니오야, 네 자신의 일에나 전념하거라. 그런 것은 하느님의 의견들이니, 그걸 이해한다고 해서 네게 유익할 게 무엇이냐."
<중아함 전유경中阿含 箭喩經>에 나오는 '독 묻은 화살을 비유'가 연상된다. 형이상학적인 물음에 대해서 부처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다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나는 세계가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고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한결같이 말씀하신 법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또한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3
사막의 교부들은 철저한 무소유를 지켰다. 무엇인가를 갖게 되면 그만큼 영혼이 불결해지는 것으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가난과 고행과 겸손과 사람을 피함이 그들의 공통적인 수덕이었다.
어떤 사람이 수도자가 되기 위해 세속을 버리면서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그중 일부를 남겨두고 한 원로를 찾아갔다. 원로는 그 사실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진심으로 수도자가 되고 싶다면 마을로 가서 고기를 사게, 옷을 벗고 맨살에다 그 고기를 바른 뒤 다시 오게."
그는 시킨 대로 했다. 들개와 새떼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살에 붙은 고기를 먹느라고 그의 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었다. 원로는 그에게 말했다.
"세속을 버리면서도 돈을 갖고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악마들이 그를 공격해올 때, 그처럼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고 만다네."
돈이 많이 들어오는 절의 주지 자리를 놓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쇠파이프와 각목, 심지어 가스총으로 무장한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싸우는 작금의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부모 형제와 세속의 인연을 끊고 출가했는지 그 근본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휴정 선사는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편하고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며, 어떤 직위나 돈을 벌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로지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며, 번뇌의 속박을 끊으려는 것이고,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끝없는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다."
어떤 사람이 한 성녀에게 가난이 선행인가고 물었는데, 성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난이, 가난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훌륭한 선행입니다. 왜냐하면, 가난을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괴롭겠지만 영혼의 평화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굳센 영혼은 자발적인 가난에 의해서 점점 더 강해집니다."
가난하고 배고픈데서 도심道心이 우러나는 것이지, 풍족하고 배부르면 번뇌와 망상이 들끓게 마련이다.
어떤 교부는 황야에서 살았는데, 빵을 얻기위해 몹시도, 고생하고 있었다. 하루는 자기가 만든 수공품을 팔기 위해 장터로 갔다. 그때 누군가 천 닢이 들어 있는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교부는 그 지갑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지갑의 주인이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연 지갑을 잃은 주인은 몹시 낙담하여 돌아왔다. 교부는 그를 불러 지갑을 찾게 해주었다.
지갑의 주인은 그에게 사례조로 얼마의 금화를 내놓았지만 교부는 완강히 거절했다. 그때의 수도자 들은 불로소득이 악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지갑의 주인은 고함을 질렀다.
"다들 와서 보시오! 이 하느님의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가를."
교부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돈지갑을 주워준 행위를 치하할까봐 남몰래 도망쳐서 그 거리를 빠져나왔다.
"수도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질문받은 원로가 대답했다.
"선은 무엇이나 실천하고, 악은 깡그리 끊어야 하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어떤 사람이 한 원로에게 물었다.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돗자리를 엮고 있던 원로는 일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 눈에 지금 보이는 바를 행하게."
종교란 말끝에 있지 않고 당장의 행동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나무는 푸르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한 말이다. 1988
-텅빈충만 - (33) 사막의 교부들..........P23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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