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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충만 - (34) 털고 버리라

나무향(그린) 2017. 7. 12. 12:32

텅빈충만 - (34) 털고 버리라

 

1

두타란 범어 dhuta를 음역한 것인데, '털어버리다' 의 뜻이다. 번뇌의 때를 털어버리고, 입고 먹고 사는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오로지 수도에 전념하는 것을 말한다. 최소한의 물질로 만족하면서 심신을 단련하는 청빈한 수행자의 생활 규범이다.

 

 두타에는 열두 가지가 있다. 부처님의 제자 마하가섭은 죽을때까지 이 열두 가지 두타행을 철저하게 지킨 것으로 후세의 한 표상이 되었다.

 

 12두타는 다음과 같다.

 ① 식사 초대에 응하지 않고 날마다 몸소 탁발을 해서 먹는다.

 ② 산에서 살며 시골이나 도시에서 머물지 않는다.

 ③ 남에게서 옷을 얻어 입거나 달라고 하지 않고, 묘지에 버린 죽은 사람의 옷을 누덕누덕 기워서 입는다.

 ④ 지붕 밑에서 자지 않고 들이나 나무 아래서 잔다.

 ⑤ 하루 한 끼만 먹는다.

 ⑥ 밤이나 낮이나 눕지 않고 앉아서 지내며,졸음이 오면 조용히 거닌다.

 ⑦ 누더기 옷일지라도 세 벌 외에는 갖지 않으며 방석이나 요 위에서 자지 않는다.

 ⑧ 무덤가에서 머물고 절에 살지 않으며,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고 죽은 사람의 해골을 보면서 좌선으로 도를 구한다.

 ⑨ 혼자서 지내기를 좋아하여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⑩ 먼저 나무 열매나 과일을 먹은 다음에 밥을 먹으며, 그 후로는 다시 열매도 과일도 먹지 않는다.

 ⑪ 노숙을 좋아하고 오두막에 머물지 않는다.

 ⑫ 고기나 우유로 만든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기름을 몸에 바르지 않는다.

 

 이와 같은 12두타는 출전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초기 불교 교단의 생활 규범을 수록한 <<십송률>>이나 <<사분률>>에 비슷하게 실려 있다. 비구란 본래 빌어서 먹는 거지를 뜻한 말인데, 이 두타행은 곧 비구의 생활방식을 드러낸것이다.

 

 부처님은 어느 때, 두타행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는 마하가섭에게 말씁하신다.

 

 "그대는 이제 몸도 늙었으니 나무 열매만 먹지 말고 대중과 함께 공양을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나 마하가섭은 이렇게 대답한다.

 

 "만약 세존께서 세상에 출현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혼자서 수행자가 되어 한평생 산속에서만 살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세존께서 세상에 출현하셨기 때문에 법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지만 수행자의 행지를 위해 대중과 함께 공양을 받지는 않겠습니다."

 

 기후 풍토와 사회적인 환경과 문화적인 배경이 다른 오늘 우리들로서는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시퍼런 생활 규범이다. 예전의 수행자들은 마하가섭 한 사람만이 아니라 많은 수행자들이 그런 투철한 청빈과 구도정신으로 살았다.

 

 

2

 현자의 수행자들은 그 어느 종파의 수행자를 막론하고 풍족한 물질과 편리한 시설, 쾌적한 생활환경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도자로서 투철한 개인의 질서 없이는 넘쳐나는 물질을 수용하면서 쾌적한 환경에 탐착하느라고, 맑은 구도정신을 지니고 정진하기가 몹시 어려운 현실이다.

 

 세상이 바뀌고 생활환경이 달라진 오늘 우리가 옛날의 수행자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또 그렇게만 살아서도 현재는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세상의 흐름에 물들지 않는 꿋꿋하고 청청한 그 구도정신만은 어떤 세월 속에 산다 할지라도 영원한 규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90일 동안의 여름 안거를 얼마 전에 마친 이 시점에서 우리 함께 한번 되돌아볼 일이다. 지난 여름 우리가 받아 쓴 시주물이며 공양에 비해,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할 그런 공부에 얼마만한 소득과 진취가 있었는가, 말로만 참선을 합네, 경을 보네, 또 무엇을 합네 하면서 먹는일에 정신을 팔고 걸치고 잠자는 일에만 관심과 시간과 정력을 탕진해버리지는 않았는지 냉철히 한번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시주는 복을 지었을지 모르지만, 수행자는 그 복을 덜었는지 지었는지도 헤아려볼 줄을 알아야 한다. 빨래터와 사물함, 목욕탕 구석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뒹굴고 있는 옷가지며 일용품들이, 그 어느 도량을 물을 것 없이 어떤 안거를 치었는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물론 무더운 여름날 애써 정진하면서 복과 지혜를 착실하게 닦아간 수행자들이 적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그런 발심 수행자들이 여기저기 있기 때문에 수행도량으로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 땅의 일부 불교계가 온갖 잡음과 비리로 사회적인 규탄을 받고 있는 그 속에서도,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그런 수행자들이 있어 우리는 희망과 기대를 잃지 않고 있다.

 

 오늘날의 수행자들에게는 풍부한 물질과 편리한 시설, 쾌적한 생활환경이 공부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육신과 정신이 편해지고 안락해지면 간절한 구도의 염이 일어날수 없다. 옛 수행자들이 말했듯이, 가난해서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데서 구도의 결의가 굳건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풍부한 물질과 편리한 시설과 쾌저한 환경이 오늘의 수행자에게는 커다란 도전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도전을 극복하려면 구도자로서 투철한 그 질서와 새로운 눈뜸이 있어야 한다. 개인의 질서와 이 시대에 대한 눈뜸이 없다면, 너와 나를 물을 것 없이 우리는 도량의 한낱 장식품이나 소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3

 도원 선사의 <<정법안장 수문기>> 에는 옛날의 수행자들이 어떤 자세로써 자기 몫의 삶에 전념했던가를 간절하게 밝히고 있다.

 

 사천성 출신의 스님이 한 분 있었다. 그는 멀리서 왔기 때문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겨우 먹이 두세 개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 먹 을 팔아 그 지방의 값싼 종이를 사서 그것으로써 겨울을 나기 위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승당에서 대중과 함께 지내므로, 그 스님이 일어서거나 앉을때면 종이의 서걱거리는 소리 때문에 몹시 시끄러웠다. 그렇지만 당사자인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정진에만 힘썼다.

 

 곁에서 보다 못한 한 도반이 그에게 말했다.

 

 "스님은 겨울을 나려면 고향에 돌아가 의복과 행구를 챙겨오시지 그러세요."

 그러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고향은 여기서 수천 리 밖입니다. 갔다가 돌아올 시간이 아까워요. 정진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그는 추위도 잊은 채 좌선에만 전념했다.

 "이런 수행자들이 있기 때문에 대국(그때의 송나라)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고 선사는 언급하고 있다.

 

 설봉 의존 선사는 처음 발심할 때부터 여러 곳의 선도량을 찾아다녔는데, 그는 가는 데마다 자청해서 전좌 소임을 보았다. 그의 행장 속에는 항상 나무로 깍아서 만든 국자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소임을 보는 분주한 여가에 틈만 있으면 밤낮으로 좌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운수 시절 동산 양개 화상을 아홉 번이나 찾아갔고, 투자 대동 화상을 세번이나 찾아갔다고 한다. 스승을 찾아 법을 구한 그의 간절한 구도정신을 엿보게 하는 모습이다.

 

 선사가 한 산의 주인이 되어 처음 설봉산에 도량을 열 무렵 절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이따금 아궁이에 연기가 끊일 때가 있었다. 또 다른 데서라면 가리고 버릴 잡곡의 찌꺼기나 콩깍지까지 먹으면서 연명, 불도를 닦았다. 그렇지만 1천5백 명이나 되는 많은 수행자들이 한 사람도 흩어지지 않고 한결같이 의연한 자세로 정신에 힘썼다고 한다.

 

 오늘 그 어떤 도량에서건 만약 절에 식량이 떨어져 대중을 한 두 끼 굶게 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한번 상상해보라.

 

 옛날의 수행자들은 먹고 입는 일에 이와 같이 초연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수행에 있었기 떄문에, 먹고 입는 일에 구애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수행자가 몸을 그르치는 것은 풍족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도를 잃게 된 근본은 풍족한 재물에 있다는 뜻이다.

 

 부처님 생존시에 재바달다가 스승인 세존을 시새워 반역을 꾀 한 것도, 마가다의 왕으로부터 날마다 많은 공양을 받은 데에 그 까닭이 있었다고 한다.

 분수에 넘친 물질의 수용은 자신을 스스로 해칠 뿐 아니라 타인에게 시기와 나쁜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인연이 된다. 동서고금을 통해 풍족한 여건 아래서 온전한 수행자가 배출된 적은 절대로 없었다.

 

 시주의 것을 거저 들어오는 공것으로 안다면, 독약을 영양제로 착각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수행자는 날마다 거듭거듭 털어버려야 한다. 본래 면목이 드러날 때까지 털고 털고 또 버리고 버려야 한다.

 

 고려 말 나옹 화상의 <백납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무엇을 얻었던가

       내가 배운 것은 오로지 가난뿐

       명예와 이익 다 부질없는 것

       누더기 가슴 비었더니 무슨 생각 두랴

       한 바리때의 삶이 어디가나 넉넉해

       이 한 맛으로 남은 생을 보내리라.  1988

 

-텅빈충만 - (34) 털고 버리라................P239~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