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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빈충만 - (39) 구석구석 쓸고 닦으라

나무향(그린) 2017. 7. 17. 11:57

텅빈충만 - (39) 구석구석 쓸고 닦으라

 

1

나는 요즘 봄앓이의 피접 삼아 산을 떠나 남해안의 한 항구 도시에 머물고 있다. 산을 내려와 시정의 한 주거 공간에서 달포 가까이 머물기는 입산 출가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나혼자서 자취를 하고 지내니 겉으로는 산에서 지내는 일상이나 다를 바 없지만, 익숙하지 않은 시정의 생활이라 자칫 무료해지기 쉬운 함정을 의식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새삼스레, 세상 사람들이 어떤 삶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가를 겉핧기로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도시는 역시 소음으로 얽혀 있다. 차들이 내닫는 소리며, 학교 쪽에서 확성기를 타고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하다가 또 뭐라고 훈시를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웃에서는 벽에 못을 박는지 아까부터 뚝딱뚝딱 망치 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따금 '쏴아 꾸륵꾸륵' 물 흘러보내는 소리도 들린다.

 

 그리고 오늘도 계란장수 차가 와서 시끄럽게 가두 방송을 하다가 갔다. 나는 처음, 확성기를 대고 뭐라고 되풀이해서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무슨일인가 싶어 일손을 멈추고 창문을 열어 보았다. 덮개를 씌운 화물차 운전석 지붕 위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가두 방송'이 되풀이해 쏟아져 나왔다.

 

 "계란들 사러 나오시오. 농장에서 바로 가지고 나온 굵고 싱싱한 계란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농장 직내 계란 판매 이동상점입니다.

 

 계란들 사러 나오시오. 중강 상인을 거치지 않고 농장 완전 도매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굵고 싱싱한 계란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나처럼 기억력이 엉성한 사람도 고스란히 외울 정도로 그 계란장수 차는 날마다 거르지 않고 서너 차례씩 지나가면서 이렇게 떠들어댄다. 처음에는 시끄럽게 들렸지만, 이것이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도시이며 그 풍물이겠거니 하면 별로 역겹지 않다.

 

 그리고 우리들 생활 주변에 또 어떤 소음이 도사리고 있는가. 눈뜨기가 무섭게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도 있을 것이고, 신문배달 아이가 아침 일찍 밀어 넣어준 조간이라는 활자의 소음이 있고, 뉴스 듣기 위해 텔레비전 스위치를 넣으면 또 영상의 소음이 우리를 감싸버린다.

 

 이런 생활환경이니 바깥에서 밀려드는 소음을 통제하는 자기 나름의 투철한 질서가 없으면 그 흐름을 타고 둥둥 어디론가 표류하기에 알맞다.

 

 우리가 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정보와 지식의 양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런 정보와 지식의 결핍으로 인해 불이익을 보는 일이 적지 않을 것이므로 거기에 등한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생활수단이지 삶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본질과 수단이 뒤바뀌면 삶 그 자체가 엉뚱한 데로 뻗어 나간다. 사람은 저마다 삶의 목표와 방향이 같지 않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감각적인 삶과 의미를 하나하나 채우려는 의지적인 삶은 결코 같은 것일 수 없다. 보람 있는 인생이란 욕구 충족에 있지 않고 뜻을 채워 나가는 데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보조 스님은<권수정혜결사문>에서 말하고 있다.

 

 "말에 따라 소견을 내고 글을 읽고 아는 체하며, 부처님이나 조사의 가르침을 쫓느라고 마음이 거기에 걸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달 그 자체를 분간할 줄을 모른다. 세속적인 명예욕과 이익에 연영하면서 법을 설해 남을 제도하려는 사람은, 마치 더러운 달팽이가 자신도 더럽히고 남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문자법사다. 어지 그를 선정과 지혜에 전념하여 명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외부에서 빌려온 지식이나 앎은 자신의 심성을 개발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때로는 결정적인 독소가 될 수도 있다. 자기 눈으로 몸소 확인하지 않고 흔히 남의 눈을 빌려서 사물을 인식하고 타인의 주관에 의해 가치 판단을 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보배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일상생활 속에서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한다. 선정과 지혜는 참선하는 선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 동안 건조해진 화분에 물을 뿜어주면서 잎새 하나하나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는 것도 선정이 될 수 있다.

비록 말이 없는 식물이지만 자기를 보살펴주는 마음씀에, 생기에 넘치는 몸짓으로 응답하는 내밀한 생명의 신비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마음의 빛인 지혜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말뜻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말에만 팔려, 화분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선정을 닦으란 말이냐고 할 사람이 반드시 나오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또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집 안을 구석구석 쓸고 닦으라.

 

 쓸고 닦는 일을 귀찮은 청소쯤으로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 그게 바로 마음 닦는 구체적인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흔이 마음을 닦는다고 하지만, 마음이 물건처럼 보여야 닦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음을 그렇게 추상적으로 관념적인 것으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마음이 가는 데가, 아니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바로 지금 이 자리가 마음이 살아 움직이는 현장 아닌가.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은 마음이 투영된 사물들이다.

 

 아무 생각 없이 쓸고 닦고 있으면 우선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릇장이나 방바닥 또는 가구나 유리창이 깨끗해지면 그걸 닦는 마음이 깨끗해진다. 왜냐하면 깨끗하고 맑아진 그것이 마음의 나타난 바이기 때문이다. 집 안이 빛나면 마음 또한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선정과 지혜는 결코 선방의 정진에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명심하기 바란다. 선방은 세간사를 등지고 선정과 지혜를 전업으로 닦는 사람들의 특정 도량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칫 위선이 끼여들기 쉽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닦는 선정과 지혜는 그 자체가 삶의 모습이므로 거짓이나 위선이 발붙일 수 없다.

 

 인도에서는 예전부터 청소부를 '마하타르(mahatar)'라고 부른다.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사람을 가르키는 마하트(mahat) 의 최고 높임말이다. 이 청소부의 도움이 없다면 이 지구는 도시건 시골이건 절간이건 가정이건 모두가 쓰레기더미로 변해버릴 것이다. 나무 청소대보살!

 

 그래서 어떤 청소부는 청소하는 일을 통해 성자가 된 이도 있다. 그는 성자가 된 후에도 빗자루와 걸레를 한결같이 놓지 않았다. 그에게는 청소가 곧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일이고, 청소하는 동안 가장 충만한 삶을 채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선정과 지혜의 닦음을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남의 손에 맡겨버리는 타성이 있다. 그 대가로 비만이 되고 의타심이 생기고 모든 동작이 느려빠지게 된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사전에서는 '게으름'이라고 뜻을 매긴다.

 

 게으름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인생에서 최대의 악덕이다. 이런 게으름이야말로 자신도 더럽히고 남도 더럽히는 달팽이의 생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

보조 스님은 같은 글 속에서 지공 법사의<<대승찬>>을 인용하고 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신이 도(진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다시 도를 구하려고 하는고, 여러 가지 뜻을 이리저리 찾아 기웃거리니 제 몸도 하나 구제하지 못하는구나. 자나깨나 남의 글과 어지러운 말만을 들추며 자칭 지극한 이치가 오묘하다고 하니, 일생을 헛되이 보내면서 어떻게 윤회의 생사에서 벗어날 것인가.

 

 혼탁한 애욕이 마음에 얽혀도 버릴 줄 모르니 청정한 지혜의 마음이 스스로 괴로워한다. 진여 법계의 숲이 도리어 가시덤불이 되었는가. 누런 나뭇잎을 보고 금이라 고집하며 금을 버리고 보배를 구할 줄 모르니, 입으로는 경론을 외울지라도 마음속은 항상 메마르다.

 

 하루아침에 우리 마음이 텅 빈 것임을 깨닫는다면 갖추어진 진여가 적지 않으리라."

 

 진리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그것이 설사 부처님이나 조사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남의 말과 글에 팔리지 말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서 자주적인 인간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일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옛 스승들의 가르침은 자기 탐구를 위한 길집이요 과정일 뿐이다. 밖에서 얻어들이려고만 하면 지혜의 눈이 열릴 수 없다.

 

 <권수정혜결사문>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한결같이 밖으로만 이름과 모양을 찾아 분별하기를, 바다에 들어가 모래를 세듯 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내서야 되겠는가."

 

 바다에 들어갔으면 진주를 찾든지 하다못해 미역귀라도 뜯어 올 것이지 부질없이 모래알이나 헤아려서 되겠는가. 이 세상이 곧 불법의 바다다. 이 바다에서 우리는 무엇을 건질 것인가. 보다 값있는 삶의 심지를 태울 수 있어야 한다.

 

 옛사람들도 말했듯이, 도는 알고 모름에 있지 않다. 거기에는 오로지 바른 눈이 있을 뿐, 자신의 본래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자신도 더럽히고 남도 더럽히는 것이 곧 문자법사라는 교훈은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남의 눈을 빌리지 말고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이해하고 판단하라. 누구에게나 불성과 정안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불조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89

 

-텅빈충만 - (39) 구석구석 쓸고 닦으라........................P275~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