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왕의 현명한 판단
부처님이 슈라바스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 나라에는 빈두로타사라는 바라문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얼굴이 추하게 생긴데다가 두 눈까지 시뻘겠다. 그에게는 시집 간 딸만 일곱이 있고. 아들은 없었다. 그 집도 가난했지만, 딸들도 궁하게 살았다.
아내는 성질이 포악해서 항상 남편을 들볶았다. 그리고 딸들은 번갈아 가면서 친정에 와 무엇이든 달라고 해서 가져갔다. 만일 요구대로 주지 않으면 갖은 앙탈을 부렸다. 또 부랑한 그 집 사위들이 몰려들면 집안에 남아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바라문은 혹시 그들의 비위를 거스를까 봐 전전긍긍했다.
어느 날 바라문은 밭에 곡식을 두고도 일손이 달려 거두지 못하다가 남의 소를 빌려 거두어들였다. 그런데 그 소를 잘 지키지 못해 그만 늪에서 잃어버렸다. 바라문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면서 생각했다.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토록 온갖 재난이 가실 새가 없는고. 안으로는 포악한 아내에게 시달리고, 딸들한테 들볶인다. 사위 놈들이 몰려오면 갖은 행패를 부리는데, 게다가 남의 소까지 잃어버렸으니, 웬 놈의 팔자가 이리 기구할까.’
그는 소를 찾아 두루 돌아다니다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숲길을 지나다가 나무 아래 앉아 계시는 부처님을 우연히 뵙게 되었다. 바라문은 지팡이에 의지하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사문 고타마는 지금 가장 안락하다. 못된 아내의 욕설이나 다툼도 없고, 딸들한테 들볶이지도 않으며, 부랑한 사위 놈들 치다꺼리를 할 일도 없다. 또 밭에 익은 곡식이 없으니 남의 소를 빌렸다가 잃어버릴 걱정도 없을 거고…….’
부처님은 바라문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말씀하셨다.
“당신 생각과 같소. 나는 아무 걱정 근심도 없소. 당신은 집을 떠나고 싶지 않소?”
이 물음에 그는 정신이 번쩍 났다.
“지금 저한테는 가정이 무덤처럼 보이고, 아내와 자식들과 얽힌 인연은 마치 원수들 속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저를 가엾이 여겨 출가를 허락하신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부처님은 그 바라문의 출가를 허락하시고, 그를 위해 설법하셨다. 그는 일찍이 착한 일을 많이 했으므로, 이내 번뇌에서 벗어나 아라한이 되었다.
부처님의 시자 아난다는 이를 보고 찬탄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저 바라문은 전생에 어떤 복을 지었기에 온갖 고뇌에서 벗어나 아라한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마치 깨끗한 천이 쉽게 물드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저 바라문은 오늘만 내 은혜를 입어 안락을 얻은 것이 아니라 지나간 세상에서도 내 은혜로 온갖 재난을 면하고 안락을 얻었느니라.
옛날에 단정(端正)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는 바른 법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게 했다. 그 나라에는 단니기라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집이 가난해 늘 굶주림을 면치 못했다. 가을이 되어서는 밭에 익은 곡식이 좀 있어 남의 소를 빌려다 추수를 했다. 추수를 끝내고 주인에게 소를 돌려줄 때 그 집 문 앞까지 몰아다 놓고는 주인에게 알리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왔다 주인도 소를 보았지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줄 알고 몰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소를 잃고 말았다.
이 일로 두 사람 사이에 승강이가 벌어졌다. 그래서 소 주인은 단니기 바라문을 데리고 왕에게 나아가 소를 찾으려고 했다. 바라문은 때마침 길에서 왕궁의 마부를 만났는데, 마부는 그에게 달아나는 말을 붙들어 달라고 했다. 단니기는 말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돌을 집어 던진다는 것이 그만 말의 다리에 맞아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마부도 단니기를 붙들고 왕에게 함께 가기로 했다.
그들은 왕궁으로 가던 도중 어느 강에 이르렀는데, 건널 곳을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마침 목수 한 사람이 입에 끌을 물고 양손으로는 걷어 올린 옷자락을 붙잡은 채 저쪽에서 건너오고 있었다. 단니기는 그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야 강을 건널 수 있소?
목수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그만 끌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끌은 없었다. 목수도 단니기를 붙들고 왕에게로 함께 갔다.
이때 단니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시달렸을 뿐 아니라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다. 길가 주막에서 술을 한 사발 얻어 평상에 앉아 마셨다. 그런데 포대기 속에 갓난아기가 있는 것을 모르고 깔고 앉은 바람에 아기는 숨이 막혀 죽고 말았다. 그러자 주모인 아기 어머니가, ‘이 무도한 놈이 우리 아기를 죽였구나.’ 하고 대성통곡하면서 단니기를 붙들고 왕을 찾아 나섰다.
단니기는 어느 담장 밑을 지나다가 곰곰이 생각했다.
‘나의 불행이여, 온갖 재난이 한꺼번에 닥치는구나. 이대로 왕에게 간다면 죽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여기서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훌쩍 담장을 뛰어넘었다. 마침 담장 밑에는 직조공이 있었는데, 그가 떨어지는 바람에 깔려 죽고 말았다. 곁에 있던 직조공의 아들은 그를 붙잡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왕에게 갔다.
그는 얼마를 가다가 어떤 나무 위에 앉아 있는 꿩 한 마리를 보았다. 꿩은 그에게 물었다.
‘단니기 님, 당신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는 지금까지 일어난 불행한 일들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꿩은 한 가지 청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왕궁에 가시거든 나를 위해 대왕께 말씀해 주십시오. 다른 나무에 있으면 내 울음소리가 듣기 싫은데, 이 나무에만 있으면 내 우는 소리가 아름다우니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고요.’
그는 다음에는 독사를 만났다.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묻는 말에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이야기했다. 독사도 그에게 부탁했다.
‘대왕에게 가시거든 나를 위해 말씀드려 주십시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올 때는 몸이 부드럽고 연해 아무 고통이 없는데, 저물어서 집으로 들어갈 때는 몸이 거칠고 뻣뻣해 몹시 아프며, 문에 걸려 들어가기가 어려우니 무슨 까닭이냐고 물어봐 주십시오.’
단니기는 그 부탁도 들어주기로 했다.
먼 길을 거쳐 그들은 마침내 왕 앞에 이르렀다. 먼저 소 주인이 왕에게 아뢰었다.
‘이 사람이 제 소를 빌려 갔는데 돌려 달라고 해도 돌려주지 않습니다.
왕이 단니기를 보고 물었다.
‘너는 왜 남의 소를 돌려주지 않느냐?
그러자 단니기가 말했다.
‘저는 참으로 가난합니다. 익은 곡식이 밭에 있을 때, 그가 고맙게도 소를 빌려 주었습니다. 추수가 끝난 후, 소를 몰아다 주인집에까지 끌어다 준 것을 주인도 보았습니다. 말로는 알리지 않았지만, 소는 분명히 그 집 문 앞에 있었습니다. 저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그 후의 일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현명한 왕은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너희들 두 사람에게 다 잘못이 있다. 단니기는 말로 알리지 않았으니 그 혀를 끊어야겠고, 소 임자는 소를 보고도 챙기지 않았으니 그 눈을 뽑아야겠다.’
소 임자는 곧 왕에게 아뢰었다.
‘차라리 저는 소를 잃고 말겠습니다. 제 눈을 빼고 저 사람 혀를 끊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두 사람의 화해를 기뻐했다.
이번에는 마부가 나와서 말했다.
‘저 사람이 돌을 던져 제 말의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왕은 단니기에게 물었다.
‘너는 저 사람의 말에게 돌을 던져 다리를 부러뜨렸느냐?
그는 꿇어앉아 아뢰었다.
‘소 임자가 저를 데리고 이리로 오는 길에 저 사람이 나를 부르면서 말을 좀 붙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말이 달아나는 바람에 붙잡을 수가 없어서 돌을 집어 던진 것이 그만 말의 다리에 맞아 부러졌습니다. 결코 일부러 한 일이 아닙니다.’
왕은 마부에게 말했다.
‘너는 저 사람을 불렀으니 네 혀를 끊어야 하고, 저 사람은 말을 때렸으니 그 손을 끊어야겠다.’
마부는 놀라서 왕에게 아뢰었다.
‘말은 제가 마련할 테니, 제발 형벌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그들은 서로 화해했다.
이번에는 목수가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 단니기가 제 끌을 잃게 했습니다.’
왕은 단니기에게 물었다.
‘너는 또 어째서 남의 끌을 잃게 했느냐?
그는 꿇어앉아 공손히 아뢰었다.
‘제가 강물을 건널 곳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려고 하다가 그만 입에 문 끌을 떨어뜨렸습니다. 일부러 그런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왕은 목수에게 말했다.
‘단니기는 너에게 길을 물었으니 그 혀를 끊어야겠다. 그리고 연장은 손으로 드는 법인데 너는 이빨로 물었다가 떨어뜨렸으니 네 앞니를 두 개 뽑아 버려야겠구나.’
목수는 이 말을 듣고 펄쩍 뛰면서 아뢰었다.
‘차라리 끌을 잃고 말겠습니다. 형벌은 내리지 마옵소서.’
그들은 서로 화해를 했다.
다음에는 길가 주막의 주모가 왕에게 자기 아기를 죽인 사실에 대해서 호소했다.
왕은 단니기에게 물었다.
‘너는 어째서 또 남의 아기까지 죽였느냐? 가는 곳마다 사고뭉치로구나.’
그는 꿇어앉아 아뢰었다.
'빚쟁이들이 저를 몹시 구박할 뿐 아니라, 배가 너무 고프고 목이 말라 길가 주막에서 술을 한잔 얻어 평상에 앉아 마셨는데, 포대기 속에 갓난아기가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습니다. 술을 마시고 나니 갓난아기는 죽어 있었습니다. 고의가 아니오니, 대왕께서는 굽어 살펴 주옵소서.’
왕은 주모에게 말했다.
‘너의 집에서는 술을 팔기 때문에 손님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손님들 앉는 자리에 아이를 눕혀 놓고 보이지도 않게 포대기를 덮어 두었느냐. 듣고 보니 너희들에게는 둘 다 허물이 있다. 네 아이는 이미 죽었으니 저 단니기를 남편으로 맞아 네 아이를 다시 낳은 뒤에 돌려 보내거라.’
이 말을 들은 주모는 새파랗게 질려 왕에게 아뢰었다.
‘제 아이는 기왕 죽었으니 서로 화해하기를 허락하소서. 저는 저 가난하고 무능한 바라문을 결코 남편으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왕은 그들의 화해를 허락했다.
다음에는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이 사람은 미친 듯이 날뛰다가 우리 아버지를 밟아 죽였습니다.’
왕은 단니기에게 물었다.
‘너는 어째서 남의 아버지를 밟아 죽였느냐?
단니기가 아뢰었다.
‘빚쟁이들이 둘러싸고 저를 핍박하는 바람에 저는 몹시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담장을 뛰어넘어 도망치려고 하다가 우연히 그 사람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고의가 아니오니 살펴 주옵소서.’
왕은 그의 아들에게 말했다.
‘둘에게 똑같이 잘못이 있다. 너의 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니, 저 단니기를 너의 아버지로 모셔라.’
아들이 아뢰었다.
‘아버지는 기왕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이 바라문을 아버지로 삼지 않겠습니다. 서로 화해하기를 허락해 주십시오.’
왕은 그들의 화해를 허락했다.
그때 단니기는 자신의 일이 모두 무사히 끝나자 기뻐하면서도 물러가지 않고 왕 앞에 남아 다시 아뢰었다.
‘저 빚쟁이들이 저를 데리고 이곳으로 올 때 길가에서 독사 한 마리가 저에게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집에서 나올 때는 몸이 부드러워 나오기가 편한데, 집으로 들어갈 때는 문에 걸려 몹시 고통스럽답니다.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고 대왕님께 여쭈어 달라고 했습니다.’
현명한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느니라. 집에서 나올 때는 아무 번뇌가 없어 마음이 화평하고 부드럽기 때문에 몸도 또한 그렇다. 독사가 밖에 나오면 새나 짐승들이 그를 침해하기 때문에 잔뜩 성이 나서 온몸이 거칠어지고 커진다. 그러므로 집에 들어갈 때는 문에 걸려 심한 고통을 받는 것이니라. 만일 밖에 나와서도 마음을 단속해 성내지 않으면 그런 걱정은 없을 거라고 뱀에게 일러 주어라.’
단니기는 또 아뢰었다.
‘여기로 오는 길에 나무 위에 있는 꿩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그 꿩이 저에게 대왕께 여쭈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른 나무에 있으면 우는 소리가 곱지 않은데, 그 나무에만 있으면 우는 소리가 화창하답니다. 어째서 그런지 그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왕은 다시 말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느니라. 그 나무 밑에는 금으로 만든 큰 가마가 묻혀 있어 그 위에서 울면 소리가 화창하게 울리고, 다른 곳에는 그런 금이 없기 때문에 소리가 맑게 울리지 않는 것이니라.’
왕은 이어 단니기 바라문에게 말했다.
‘너는 허물이 많았지만, 나는 다 용서했다. 너는 집이 몹시 가난하다. 그 나무 밑의 금으로 이루어진 가마는 내 소유라야 하겠지만, 그것을 너에게 줄 테니 파서 가져라.’
단니기는 왕의 지극한 배려에 감사했다. 그는 부자가 되어 안락하게 지냈느니라.”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그때의 왕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 몸이요, 바라문 단니기는 지금의 저 빈두로타사니라. 나는 그 옛날에도 그의 온갖 재난을 구제해 주었고, 이번 생에도 그의 고통을 덜어 해탈케 했노라.” <현우경> 단니기품檀膩奇品
어진 왕의 현명한 판단을 들으면서, 이런 군주가 나라를 다스린다면 태평성세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왕은 요즘 말로 하자면 유머가 넘치는 인품을 지녔다. 기왕에 일어난 일 을 가지고 벌하려 하지 않고 현재의 모순과 갈등을 해소하려는 데 그의 최대 관심이 있다.
어린아이를 잃은 길가 주막의 주모더러“그대 아이는 이미 죽었으니 그 사내를 남편으로 맞아 아이를 다시 낳은 후 돌려보내라.”고 한 왕의 판결은 명판결(?)이 아닐 수 없다. 이 판결을 듣고 우리는 미소를 짓는다. 모르긴 해도 이 경전을 편찬한 사람도 미소를 지으면서 엮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미소가 그 많은 세월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고 오늘의 우리에게까지 옮겨 심어진 것이다. 또 먼 훗날까지도 이런 미소는 살아 있을 것이다. 흐뭇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처럼 각박한 세상에 이처럼 푸근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조였던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어 놓고 싶어진다. 내가 이 긴 이야기를 옮겨 실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전의 표면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바라문이 출가하기 전에 그의 아내와 딸들과 사위들한테 허구한 날 들볶인 것은, 그가 전생에 고의는 아니었더라도 여러 사람한테 입힌 피해의 과보일 것이다.
이 설화는 다행히 현명하고 유머 있는 왕을 만나 법의 처벌은 면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과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넌지시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도 보리심을 발하면 마침내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함께 보여 준다. <법정 스님 '인연이야기'>...............................P21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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