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산책 ▒/미당 서정주

질마재로 돌아가다 - [20] 자화상

나무향(그린) 2013. 8. 5. 04:52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셋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어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P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