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사슴 - 법정스님
그 옛날 바라나시에서 브라흐마닷타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보살은 사슴으로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그의 몸은 온통 황금빛이었다. 그는 5백 마리의 사슴에게 둘러싸여 숲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를 일러 니그로다 사슴이라 했다.
그때 왕은 사슴 사냥에 빠져 사슴 고기 없이는 밥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늘 생업에 바쁜 백성들을 불러내어 날마다 사슴 사냥을 나갔다. 백성들은 의논 끝에 드넓은 궁전의 뜰에 사슴이 좋아하는 먹이와 물을 마련해 두고, 숲에서 사슴 떼를 몰아다 넣은 뒤 문을 닫아 버렸다. 왕은 뜰에 그득하게 갇혀 있는 사슴들을 바라보며 흐믓해했다. 그러다가 그 우리 속에서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사슴을 발견하고, 그 사슴만은 다치지 않도록 하라고 시종들에게 특별히 일러두었다.
이때부터 왕은 끼니때가 되면 뜰에 나가 사슴을 한 마리씩 활로 쏘아 잡았다. 사슴들은 활을 볼 때마다 두려워 떨면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은 화살에 맞아 죽어 갔다.
니그로다 사슴은 많은 사슴들이 화살에 맞아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것을 보고, 이제부터는 이쪽에서 차례를 정해 놓고 스스로 처형대에 오르기로 했다. 다른 사슴들에게 두려움과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날부터 왕은 몸소 활을 쏘지 않아도 되었고. 자기 차례가 된 사슴은 제 발로 걸어가 처형대에 목을 대고 가로누웠다. 그러면 요리사가 와서 그 사슴을 잡아갔다.
그런데 하루는 새끼를 밴 암사슴의 차례가 되었다. 이런 사정을 안 황금빛 니그로다 사슴은 "당신은 아기를 낳은 다음에 오시오. 내가 대신 가겠소." 하고 처형대로 나아갔다.
황금빛 사슴이 처형데에 누워 있는 것을 본 요리사는 왕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왕은 뜰에 나와 니그로다 사슴을 보고 말했다.
"나는 너를 죽일 생각이 없는데, 어째서 여기 누워 있느냐?"
"대왕이여, 새끼 밴 어미 사슴의 차례가 되었기에 제가 대신 죽으려고 나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속으로 크게 뉘우쳤다.
"나는 너처럼 자비심이 많은 이를 인간들 속에서도 보지 못 했다. 너로 말미암아 내 눈이 뜨이는 것 같구나. 일어나라. 너와 어미 사슴의 목숨을 살려 주리라."
"대왕이여, 둘의 목숨을 건질 수 있다지만 다른 사슴들의 목숨은 어찌합니까?"
"좋다, 그들도 구해 주리라."
"그럼 사슴들은 죽음을 면하겠지만, 다른 네팔 가진 짐승들은 또 어찌합니까?"
"좋다, 그들의 목숨도 보호하리라."
황금빛 사슴은 다시 간청했다.
"네발 가진 짐승들은 안전하겠지만, 두 발 가진 새들은 어찌합니까?"
"좋다, 그들도 보호하리라."
"대왕이여, 새들은 안전하겠지만 물속에 사는 어류는 어찌합니까?"
"착하다, 나그로다여! 그들도 모두 안전하게 해 주리라."
이와 같이 보살은 왕에게 모든 생물의 목숨을 보호해 주도록 간청했자. 그렇게 왕의 눈을 뜨게 한 후 남은 사슴들과 함께 살던 숲 속으로 돌아갔다. <자타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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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 속의 보살은 부처님의 전생 중 하나를 가리킨다. <본생경本生經>이라고도 부르는 <자타카>는 고대 인도의 불교 설화집이다. 팔리어로 쓰인 상좌부上座部의 경장經藏(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을 모은 경전)중 소부小部에 들어 있는 텍스트로, 모두 22편 547종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자타카'는 본래 '태어나더' 혹은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본생경'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주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보살로서 생을 거듭하는 사이에 천인, 국왕, 대신, 서민, 도둑, 또는 코끼리, 원숭이, 공작, 물고기, 사슴 등의 동물로서 활동하던 시절(전생)이 이야기 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단순히 전생 이야기가 아니라 부처님이 수많은 생을 수행자로 거쳐 온 일들을 기록한 설화집이다. 아직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수행자(보살)였던 부처님이 전생에서 어떤 선행과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현생에서 부처가 될 수 있었는지 그 인과를 이야기하고 있다.
새끼를 밴 어미 사슴을 대신해 죽으려고 나온 황금빛 사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연상되는 것은, 우리나라의 일부 못된 도축업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소에게 물을 먹여 도살하는 행위다. 말 못하는 짐승의 다리를 부러뜨려 차에 매달아 끌고 다니다가 호스를 소의 입에 대고 억지로 물을 먹이는 장면을 뉴스에서 보면서, 같은 사람인 내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사람으로서 짐승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이런 짓을 하면서도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얼마나 잘살 것인가.
지은 업이 달라 똑같은 생명의 뿌리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또는 짐승의 탈을 쓰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윤회의 법칙이라면, 아무 죄도 없는 말 못하는 짐승을 잔인하게 학대해 죽이는 그 결과는 또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 소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이런 잔인한 살생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한번쯤 돌이켜 보아야 한다................p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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