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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태조(太祖, 1335~1408) 재위기간: 1392~1398 - 건원릉

나무향(그린) 2011. 2. 4. 21:33

지정종목 : 사적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지정일 : 1970년 05월 26일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4-2

시대 : 조선

종류/분류 : 왕실무덤

 

 

 

 

 

 

 

 

 

 

 

 

 

 ▲  보물 제1741호 -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 사적 제193호 - 구리 동구릉 / 건원릉 - 태조의 무덤.111229.

 

-조선 제1대 왕 태조(太祖 1335~1408, 재위 1392∼1398)의 무덤이다. 9개의 조선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호) 경내에 있다. 전체적으로 고려 공민왕의 능인 공민왕릉(현릉)을 본떠 만들었으나 고려시대 왕릉에는 없는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봉분 주위를 두르고 있고, 석물들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를 심지 않고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했던 아버지를 위해 태종이 태조의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2지신상을 새긴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봉분을 감싸고, 봉분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이 둘러져 있다.

 

난간석 밖으로는 왕을 지키는 영물인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4개씩 교대로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鼓) 모양의 고석(鼓石) 5개가 놓여 있다. 봉분 아랫단에는 석마(石馬)가 한 필씩 딸린 문인석 1쌍이 있고, 그 아랫단에는 역시 석마가 딸린 무인석 1쌍이 마주 서 있다.

 

태조는 1408년(태종 8) 5월 24일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숨을 거뒀다. 영의정 하륜(河崙) 등이 산릉지(山陵址)를 물색하다가 그해 6월 28일 현 위치로 결정하였고, 7월 5일 충청도·황해도·강원도에서 군정(軍丁) 약 6,000명을 징발하여 7월 말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고 석실을 만들었다. 9월 7일 태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에 나가 견전례를 행하고 발인하였다.

 

 

건원릉

     - 태조 : 이성계(1335~1408), 재위기간 : 1392.7~1398. 9 (6년 2개월)

 

왕릉은 국법에 따라 도성인 한양을 중심으로 반경 4킬로미터 밖 40킬로미터 안에 왕실의 능역을 두도록 태조 이성계는 동구릉 한 자락에 고이 모셔졌습니다. 그리고 대신 함흥땅에 나는 억새를 가져와 봉분 위에 심었습니다. 건원릉은 다른 능과는 달리 벌초를 일 년에 단 한 번만 한다고 합니다. 억새가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억새는 해마다 뿌리를 내리고 다시 피어나 꾸준히 이성계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 태조 이성계 조선을 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고려말 신진세력으로 무예가 출중한 무사였습니다. 이성계는 1380년 8월 금강 어귀에 상륙한 왜구를 대대적으로 격파한 황산대첩으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왜구를 섬멸했다는 것은 왜구의 약탈과 방화에 고통을 받아온 백성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백성들은 이성계를 입을 모아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시대상황은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가며 암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권문세족들의 탐욕스러움과 부정부패,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백성들은 그 들을 구원해줄 영웅을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그 중심에 이성계와 최영이 있었습니다.   이성계와 최영은 요동정벌을 놓고 팽팽한 의견충돌을 벌였습니다. 요동을 정벌해야 한다는 최영과 절대 불가하다는 이성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위해 출정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다시 군사를 돌려 회군합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홍수로 물이 불어나 군사들이 죽어갑니다.

2. 전염병이 창궐하여 군사들은 싸울 힘도 없습니다.

3. 무더위로 아교가 녹은 활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성계는 회군하여 최영을 체포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백성들을 위한 개혁정치를 단행하여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이성계는 마침내 1392년 공양왕으로부터 왕권을 이어받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열었습니다. 이성계는 이렇듯 정치적으로 강력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거느리는 부하들에게 관대하며 백성들에게는 절대 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인품은 국가를 세울 때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삼았으며 농업을 국가 경제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나라의 모습과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한양은 조선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오기까지 국가의 중심도시로 꾸준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 사적 제193호 - 건원릉(구리 동구릉). 1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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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29  ▼ 140511

 △ 사적 제193호 - 건원릉(구리 동구릉). 140511.

 

-조선 태조의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약 10년 동안 있었다.

 

 1408년 5월 14일에 태조는 향년 7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태조가 승하한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 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건원릉은 고려왕릉 중 가장 잘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기본으로 만들어 졌다 한다.그 형식으로 살펴보면 우선 넉넉한 크기의 봉분 아랫 부분을 12각의 화강암 병풍석이 싸여 있다. 여기에 주의깊게 보아야 할 것은 봉분의 풀이다. 유독 건원릉만 억새풀이다.

 

=푸른 잔디가 있는 여느 왕릉들과는 달리 태조의 건원릉의 봉분에는 억새 봉분이 형성되있다. 야사에서는 태조가 본래 신덕왕후가 있는 정릉에 같이 묻히기를 바랐는데, 당시 태종은 정릉 주변의 백 보 밖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을 정도로 신덕왕후를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부자관계는 골이 꽤 깊었다 한다. 그런 아들 태종이 태조의 뜻을 들어줄리는 만무하다 생각하였고, 태종에게 조상들이 묻혀 있는 함흥 땅에 묻어달라 유언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초대 왕이었던 태조를 한양과는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다면, 제사를 지낼 때 문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고, 그렇다고 유언을 거스를 수는 없다 생각하였기에, 고향인 함흥산 억새풀로 마지막 옷을 해드렸다는 전설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