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답사 ▒/조선왕릉

제2대 정종(定宗, 1357~1419) 1398~1400 - 후릉

나무향(그린) 2011. 2. 3. 08:14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厚陵)

 

모셔온 글 http://cafe.daum.net/BulgaeDaenggyeon/iIkP/680?q=%C1%A62%B4%EB%20%C1%A4%C1%BE&re=1

 

 

 

 

 

 

 

 

 

 

후릉은 조선 2대 정종(定宗; 1357~1419, 재위 1398~1400)과 비 정안왕후(定安王后; 1355~1412) 경주 김씨의 능으로 조선 개국 후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나란하게 난간석(欄干石)으로 연결한 쌍릉(雙陵)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태종 12년인 1412년 6월 25일 정안왕후가 58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후릉에 안장되고, 그로부터 7년 뒤 정종이 승하하여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여 쌍릉을 이루었다. 능역은 능침에 문무인석 각 2쌍, 석양과 석호 각 2쌍, 석마 각 2쌍, 장명등 각 1좌씩, 혼유석 2좌, 병풍석, 난간석이 있다. 정자각과 비각은 모두 소실된 상태로 현재 능표석만 남아 있고, 석마 중 일부는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지역에 소재하고 있어 자세한 경관은 볼 수 없지만 북한에서 발간된 사진으로 볼 때 많은 풍화(風化)와 소실된 모습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현재 북한의 개성군 흥교면 흥교리[현 황해북도 개풍군 영정리]에 소재하고 있다.

 

정종은 태조(太祖)와 원비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둘째 아들이며, 휘를 경(曔)이라 하였으나 즉위 전의 휘는 방과(芳果)였다. 온화하고 용맹하며 지략이 뛰어나 일찍이 아버지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1398년 1차 왕자의 난으로 당시 세자였던 의안대군(宜安大君) 방석(芳碩)이 피살되자 정안대군(定安大君; 태종) 등의 추천으로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가 그 해 9월 태조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왕위에 오른 이후 서울의 운기가 나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그 곳에서도 두 번째 왕자의 난을 겪었다. 이후 향약제생 집성방의 편찬, 관제 개편, 사병 혁파 등과 같은 치적이 있었으나 이는 주로 실권을 쥐고 있던 정안대군의 영향력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재위 2년만인 1400년 11월에 당시 왕세자로 있던 동복동생 정안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는데 이후 1419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인덕궁에서 승하할 때까지 격구, 연회, 강무[사냥] 등으로 심신을 단련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정안왕후 사이에 후사가 없었으나 다만 10명의 후궁들 사이에서 17남 8녀 등 많은 자녀를 두었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으므로 과도 통치권자를 의미하는 ‘권서국사’로서만 인정되었기에 묘호를 받지 못한 채 단지 명나라에서 내려준 시호인 공정을 붙여 공정왕(恭靖王) 혹은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만 불리우고 있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 정종이라는 묘호와 더불어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이라는 정식 시호를 받게 되었다.

 

정안왕후 경주 김씨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김천서(金天瑞)의 딸로 정종과의 사이에 후사를 두지 못했다. 1398년 남편 영안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빈에 봉해졌으며, 그 해 9월 세자 영안대군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 덕비(德妃)로 불리웠다. 이후 1400년 정종이 물러나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었는데 조선 개국 이후 최초로 왕대비가 되었으며, 1412년(태종 12)에 58세로 승하하여 지금의 자리에 모셔졌다.

 

신의왕후 제릉과 더불어 북한에 소재하고 있으므로 2009년 조선 왕릉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을 때 제릉과 함께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

-추가

제2대 정종(定宗, 1357~1419) 1398~1400

휘는 방과(芳果). 사병을 삼군부에 편입시킴. 즉위 2년만에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음.

 

-제2대 정종(定宗) - 후릉(厚陵)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북한 소재) 북한 사적 미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