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196호
명 칭 : 영월 장릉 (寧越 莊陵)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 3,495,236㎡
지정일 : 1970.05.26
소 재 지 :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영월군
자료참조 : 문화재청
*사적 제196호.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4리에 있다. 단종이 세조의 왕위찬탈로 1457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상왕복위계획이 탄로되어 죽음을 당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 선조 때 김성일(金誠一)·정철(鄭澈) 등의 장계(狀啓)로 묘역을 수축하고 표석을 세웠다.
1610년(광해군 2) 노릉암(魯陵庵)이라 했으며 1668년(현종 9)에 수호하는 참봉 2명을 두었다. 1681년(숙종 7) 대군(大君)으로 추봉되었으며 1698년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상설(象設)은 추봉된 정릉(貞陵)의 예에 따라 난간과 무석을 설하지 않았고, 양식은 간단하게 작은 후릉(厚陵) 석물의 것을 따랐다.
따라서 장릉의 석물은 숙종·영조 연간에 만들어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능석물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며, 명릉(明陵:숙종의 능) 이래 만들어지는 4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은 장릉에서 그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백과사전
△ 사적 제196호 - 영월 장릉. 111121.
-제6대 단종(端宗, 1441~1457) 1452~1455.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계유사화로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함.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음.
========================▽ 사적 제196호 - 영월 장릉. 1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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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화유산-장릉(앞) |
▲ 세계문화유산-장릉(뒤) |
▲ 장옥판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한 것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 32인, 조사위 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위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유해를 모셔 놓은 곳이다.
▲ 배식단
이곳은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위, 조사위,환자군노, 여인위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단종 제향을 올린 후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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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복실 |
▲ 단종 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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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홍도 정려각
△ 사적 제196호 - 영월 장릉. 141025.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무덤이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1441년(세종 23년) 7월 23일 탄생했으나 이튿날 모후를 여의였다. 이름이 '홍위'인 단종은 8세 때인 1448년(세종 30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마저 재위 2년 만에 경복궁의 정침에서 승하하자 보령 12세라는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1454년 정월에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니 이가 곧 정순왕후다. 1455년 윤6월에 수양대군은 조정의 제신들과 의논, 왕의 측근인 금성대군을 비롯하여 여러 종친과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각 지방에 유배시키기를 청했다. 단종은 하는 수 없이 그대로 따랐을 뿐만 아니라 사태가 더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상왕이 되어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다 한다.
1456년(세조 2년) 6월. 세조의 이러한 처사에 반대하여 상왕을 복귀 시키려는 사건이 일어 났다. 이 사건에 상왕인 단종도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세조는 1457년 6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군사 500명의 호송 아래 영월 청령포로 유배 되었다.
그런데 그해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 되었던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 났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으며, 10월에는 마침내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모의에 자극을 받은 세조가 후환을 없애고자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왕명을 받들고 내려온 금부도사 왕방연은 사약을 가지고 관풍헌에 당도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대 공생 복득이란 자가 단종의 뒤에서 활시위로 목을 졸라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니 1457년 10월 24일의 일이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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