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산책 ▒/시인 백석

북방에서 / 백석

나무향(그린) 2006. 2. 10. 22:51

북방에서


    1940년대 백석의 시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극심한 회의와 갈등을 보여준다. 이러한 회의와 갈등은 이 시기에 들어서서 더욱 가혹해진 식민지 수탈과 식민지 세력의 팽창 앞에서 망국민으로서 겪게 되는 무력감과 가책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인다. 30년대 이래 팽창 일로에 있던 일제의 세력은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시점에서 그 극에 달하며 그러한 팽창하는 세력 앞에서 민족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더욱 더 불투명해지고 일제 말기에 가해진 민족말살정책은 우리 민족에게 무한한 굴욕과 모멸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좌절과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살펴본 바 있는 <목구>는 이러한 식민지 말기의 민족말살정책 앞에서 한 시인이 겪을 수밖에 없는 역사 앞에서의 죄책감과 좌절, 슬픔을 노래한 것으로 그의 현실 인식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시이다. 일제의 극심한 수탈로 인해 마을이 황폐화되고 민족적 삶이 해체되던 시기에 우리 민족 자체를 말살하고 일본 신민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은 집안으로 치면 집안의 제사가 끊기고 나라로 칠 때는 민족의 대가 끊기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목구>는 지금까지 온갖 시련과 외침을 견디어내고 꿋꿋이 대를 이어준 민족을 자신의 어리석음과 잘못으로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한다는 역사에 대한 죄책감과 가책을 한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에 비유하여 보여주고 있는 시로, 민족의 수난을 자신의 힘으로 감당해 보려는 한 시인의 좌절과 슬픔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앞에서의 무력감과 가책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북방에서>에도 잘 나타난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일제 말기의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자책감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의 화자는 백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되던 때부터 현재까지 살고 있으면서 민족의 역사와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 해온 역사적 화자이며 그의 삶은 역사 자체이다. 이 화자는 현재의 입장에서 자기가 살아온 삶과 역사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가책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부여, 숙신, 발해, 요, 금, 흥안령, 송화강, 음산, 아무우르는 우리 민족의 옛 터전이며 송어, 메기, 너구리, 사슴, 개구리 등은 그곳에 사는 자연물들이다. 화자의 삶은 이곳에 사는 자연물들과 족속들을 배반하고 떠남으로부터 시작되는데 "배반하고", "속이고" 등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떠남은 현재의 입장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3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떠남의 밑바탕에는 "이기지 못할 슬픔", "시름"이 개재되어 있지만 화자는 그러한 시름이나 슬픔 없이 자신을 의지하고 살던 오로촌, 쏠론족과 산천과 거기에 사는 자연물들을 배반하고 떠나왔으며 그것은 "단샘"이나 "낮잠", "매끄러운 밥", "하이얀 옷" 등이 보여주듯이 현실을 극복한다기 보다는 회피함으로써 일신의 안일을 추구하는 행위로 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는 구절은 떠남 이후의 그의 삶의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삶 전체가 그러한 비겁성으로 얼룩져 있으며 그로 인해 급기야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르게 되고 그 때에 와서야 슬픔을 안고 옛 고향으로 찾아가지만 거기에는 조상도, 일가친척도, 자랑도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고백을 통해 일제 말기의 극한적인 상실감과 자신의 삶에 대한 가책과 슬픔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화자의 삶은 북방의 광대한 영역을 버리고 한반도라는 작은 국토로 축소되는 과정, 그리고 그 속에서 여러 차례의 외침과 수난을 겪으면서 먼 곳에서 짖는 "개소리에도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국세가 약화되고 모멸을 당하면서도 사대로 큰 나라를 섬기고 안일하게 지내다가 드디어는 나라마저 빼앗기고 유랑하는 우리 민족의 역사 그 자체이다.
      이 시는 백석이 북방을 유랑하던 시절에 씌어진 것으로 그의 역사에 대한 가책을 보여주는 시이다. 특히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한 반성을 삼자의 입장이 아닌, 민족의 역사와 함께 살아오고 있는 화자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역사를 조상들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짊어지고 그 슬픔을 감당하려는 한 시인의 진실한 면모와 역사적 현실 앞에서의 무력감과 가책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내용출처 : http://nongae.gsnu.ac.kr/~jcyoo/reread/bukbang.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