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보살
성북동 길상사 <침묵의 방>은 하루 이용인 600 명
참선수행을 하는 <시민선방>은 1500 여 명이 찾는다.
수녀들도 즐겨 명상하는 길상사는 대체 어떤 절일까?
이곳은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인 대원각 터.
우리나라 3대 요정이 위치한 곳은 공교롭게 청와대 인근.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정치권력 심장부와 함수관계일까?
이조시대 왕이 민정시찰을 나갔다가 쉬어가던 기방.
이조시대 궁궐기생 소춘풍과 성종과의 몰래 한 사랑.
우리나라의 3대 요정은 베일에 가려진 안가와 같았다.
주지육림의 바다이고, 밀실정치의 총본산이었던 대원각,
부정과 협잡과 야합의 상징이었던 7000 여평 요정 대원각
드넓은 땅과 숲 속에 40동의 건물을 자랑하고 있었던 요정.
국내 최대 요정인 대원각의 주인은 김영한(金英韓) 할머니.
1987년 김영한 할머니는 설법차 LA에 온 법정 스님과 첫 만남.
이 자리에서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그러나, '무소유'를 화두삼아 살아온 법정스님은 정중하게 사양.
이때부터 10 여년간 김영한 할머니와 법정스님 간 기이한 실랑이.
"제발 제 시주를 받아주십시오, 스님."
"나는 그 시주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싯가 천억원 대 재산을 조건 없이 시주하겠다는 김영한 할머니
'받을 수 없다.'는 법정스님의 끈질긴 실랑이는 10년간 되풀이
아마도 이런 기이한 실랑이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결국, 김영한 할머니가 10년 만에 두 손을 들며 실랑이는 끝났다.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 후, 등기를 이전
1996년 5월 20일에 대원각은 송광사 재산일 뿐, 법정스님과는 무관.
여기에 법정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의 정성과 신심이 모아졌다.
하여, 기존 건물을 개보수, 새로운 사찰인 길상사가 태어났다.
지리산 자락 거림 도장골 입구에 하계 휴양소..길상사.
1997년 12월14일 길상사 개원식에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
이날 길상사의 회주(會主) 법정스님은 개원 인사말로 다짐.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도량.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사스러움과 흥청거림에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 법명을 주고
아울러, 108 염주 한 벌을 손수 할머니 목에 걸어주었다.
천억 재산을 시주한 보답으로 목에 걸린 108 염주 한 벌.
법정스님이 목에 걸어준 염주를 만지고 또 만지던 할머니.
“내가 평생 일군 터에 부처님을 모셔 한없이 기쁩니다”
1년 후인 1999년 11월13일 오후 길상사 경내를 마지막 산책.
"나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주세요.”
다음날인 11월14일 108 염주 한 벌을 목에 건 채 83세에 운명.
12월14일 거림 길상사에 눈 내리던 날, 스님들이 재를 뿌려준다.
그녀의 육신은 한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영혼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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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향기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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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길상사의 수식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주차장 거의 모든 자동차 유리창 위에 연꽃 스티커
따뜻한 차 한 잔, 부담스럽지 않은 침묵, 고요한 산책.
반나절 여행으로 서울 도심에서 세 가지를 즐길 만한 곳.
성북동의 조용하고 큼지한 주택 사이에 자리 잡은 길상사.
세속에 있으나 세속적이지 않은 사찰로 알려진 길상사.
일주문을 들어서는 순간 깊은 산사의 고요함이 있는 곳.
요정 대원각 시절의 낡은 소슬대문이 지금 길상사 일주문
건물의 서까래가 썩고 기왓장이 깨져 지붕을 뒤덮은 천막
사천왕문도 해탈문도 없지만, 설법전 앞에 가녀린 보살상
이 보살상은 가톨릭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씨가 만든 작품.
울긋불긋한 단청도 없는 길상사는 언제 들어와도 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길상사 경내에서는 수녀님들도 만날 수 있다.
수백년 된 느티나무 고목 아래 종각 옆 차 마실 수 있는 다원
'작은형제 수도회' 수사님들이 길상사에 부할절달걀을 선물
12월 중순 길상사의 프랭카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수녀님들은 경내만 산책하지않고 길상사 '침묵의 방’도 애용.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침묵의 방’
캐돌릭 수녀님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까? ‘
사랑의 씨튼 수녀회’의 한 수녀님은 그 소감을 이렇게 남겼다.
“님의 빛으로 빛을 봅니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군요.
정말 편히 잘 쉬다 갑니다. 모두 감사해요.”
요정 대원각을 사찰로 바꾸는 개보수 작업에만 적지 않은 비용
그래서 길상사는 현재 개보수 비용을 빚으로 짊어진 가난한 절.
대웅전, 관음전, 사천왕문, 해탈문도 없고, 석탑 하나도 없는 절.
그런데도 개원 2년 6개월 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는 절.
법정스님의 법문이 있는 짝수 달 셋째 일요일의 가족법회
천 명에서 이천명에 이르는 인파가 몰려 그야말로 인산인해.
길상사에 가면 유명인사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요일 별로 당번을 정해 자원봉사하는 '보현회' 회원들.
기업체 사장 부인, 중학교 여교장, 공직자 부인에서 교사,
포장마차 주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봉사활동.
길상사 법회 날에는 길목 어귀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남자들
교통정리, 주차관리, 사찰 안내를 도맡아 하는 거사림회 회원
기업체 사장, 공직자, 의사, 교사, 전문직 종사자 등 각계각층.
특히 수련생들은 끼니때 먹기 전에 오관게(五觀偈)를 독송한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고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을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도업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음식을 먹을 적마다 이 게송을 외우면서
뼈저리게 자신을 되돌아보았다는 고백들.
길상사에는 오늘도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분에 넘치는 부를 넘보지도 않으며
허황한 영예를 쫓지도 않는 평범한 사람들, 착한 사람들.
누가 오라고 부르지도 않고, 누가 가라고 떠밀지도 않건만,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 둘 '맑고 향기로운' 길상사를 찾는다.
예전에 고기 굽는 냄새 진동했던 대형 음식점 대원각(大苑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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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까지 주지육림 국내 3대 요정으로 알려진 대원각.
음주가무 풍류객들이 드나들던 출입문은 그대로 일주문
'금실'과 '은실'이 들어 있던 중앙 신관은 법당(극락전)
대원각의 오른쪽 대연회장 '송실'은 설법전으로 꾸며졌다.
경비실 겸 운전사 대기실로 쓰였던 출입문 옆 팔각정은 종각
대원각의 물레방아가 있는 계곡 옆 별채 「특실」은 스님 선방
김영한 할머니가 6·25전쟁 중 당시 6백 50만원에 터를 매입
건물들을 앉혔을 때 법정은 출가 3년 전, 전남대 철학과 학생.
대원각의 주차장과 테니스장 자리에 언젠가 대웅전이 들어설 곳.
지난 10년 갈비 굽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주지육림 터였던 대원각.
김영한 보살 장례식의 상주 호스티스만 2백명 넘었던 고급 사교장.
승속일체(僧俗一體)의 가람 대들보마다 아직도 배어있는 고기 냄새.
진흙탕에서 연꽃이 피어나듯 사찰로 뒤바뀐 옛 요정 대원각.
이 터가 오늘날 길상사를 있게 한 것은 믿기 어려운 과거지사
'길상화 보살'은 생전에 수십년 전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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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 부근을 지나치는 일이 있었지요.
지금처럼 주변에 저택들이 있던 때가 아니었어요.
그냥 산중이었지.
호랑이가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
전란 중에 켈로부대가 주둔할 때는
무슨 산적 소굴 처럼 으시시했지요.
나는 이 터가 첫 눈에 마음에 들었어요.
포근하고 마음이 턱 놓이고…
이런 곳에 내가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
그냥 끌리는 거였어요.
말로는 참 표현하기 힘든 그런 마음의 조화였어요.
내 첫 남자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경험하는 이끌림.
신기한 일이라고 할 밖에요.
그로부터 몇년후 우연한 기회에
그 터의 주인이 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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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料亭)이란 '요리집’이라는 뜻의 일본식 표현방식이다.
즉, 대원각은 우리나라에서 일본식 요정의 선두 주자였던 곳.
구한말 기생이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뀌며 기생청 대신 권번
권번에서 기생들을 교육시키고 관리하였으며 세금을 부과했다.
하여, 기생에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직업화와 양성화를 유도.
그 후, 일제 강점기에도 존속되었다가 2차 대전 막바지에 폐지.
권번에서 운영하는 기생집들을 일본인들은 요정이라고 불렀고
그 이후 기생집 또는 방석집, 고급 술집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해방 후 6·25와 5·16을 거치면서 권번기생들은 없어지고
대신 접대부를 고용해서 고급상차림으로 유흥업을 하는 업소
요정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군사정권 시절의 요정정치.
과거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요정에서 국정을 논의
흔히, 밀실정치(요정정치)란 고위급 정부관료들의 연회장소이다.
비지니스를 위해 접대 공간인 룸싸롱도 현대사회 정경유착의 산실.
80년대 말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이던 대원각.
대원각이 사찰이 되기 전까지는 요정에서 음식점으로 탈바꿈.
그 때 이미 김영한 할머니는 대원각을 시주할 마음을 굳힌 듯.
가난한 탓에 부실한 신랑에게
몸 팔려 시집 간.. 15살의 미순.
그녀가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
우물에 빠져 죽었던 부실한 남편.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눈물이 마를 날 없었던 미순
그녀 스스로 선택한 '기생의 길'.
바람에 달 가듯 떠돌던 김삿갓 같은 백석.
기생이 된 여인 가련과 운명적인 첫 만남.
22 나이에 첫 사랑을 느낀 가련
사랑에 빠져들고 김삿갓은 떠난다.
그후, '백석'과는 남북 분단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
통일이 되어 그가 돌아올 날만 기다리며 혼자 산 그녀.
백석이 돌아올 날 고대하며 모은 전재산을 시주하고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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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애절한 첫 사랑, 백석!..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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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白石)은 1936년 시집 ‘사슴’을 발간하며 문단에 등단.
우리 말의 멋과 맛을 주옥 같이 담아낸 이 시집은 단 100부만 출간.
시인 윤동주마저 그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손으로 베껴 간직했었다.
시인 신경림(申庚林)은 6·25 후 헌 책방에서 이 시집을 찾아내고 감격.
‘사슴’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 구실을 했다”고 되새기기도 했다.
백석의 시(詩)는 평안도 방언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낸 맛.
남쪽에서는 정지용, 북쪽에서는 백석 이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향 선배 김소월이 '한과 절규의 시'라면 백석은 '내면의 피울음'.
그는 결벽증이 유난해 전차 손잡이도 손수건으로 감고 잡을 정도.
그가 광화문을 걸으면 거리가 '파리'처럼 환해질 만큼 멋쟁이였다.
그러나, 타고 난 방랑벽은 어쩔 수 없어 만주로 떠나 온갖 고생 자청.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고당 조만식의 영어·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
남북 분단으로 북한에 남게 되자 그는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지워져간다.
백석은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내기도 했지만
끝내 협동농장으로 추방돼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이 다시 문단에 복귀한 것은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조치.
그후, 그녀는 아낌없이 사재를 털어 '백석 문학상'을 후원.
그녀가 얼마나 '백석'을 사랑하였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
'그녀가 시주한 대원각은 원래 어떤 곳이었을까?
대원각.
김영한 보살이 몸담았던 대원각은 국대 3대 요정 중에 하나.
'제 3 공화국의 요정 정치'가 정치와 경제를 주름 잡던.. 시절.
그 사회적 배경을 타고 급성장한 대기업 규모의 요정이 대원각.
일본 기생파티 관광객들이 관광버스로 줄줄이 요정 찾던 1970년.
관광산업의 꽃 요정은 굴뚝 없는 공장이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당시,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될, 외화획득 수입원으로 각광 받기도 했다.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6.25 사변 이 후..굶주렸던, 보리고개를 거쳐.. 새마을 운동..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된다.'는 황금만능주의 움틀 무렵.
꽃 다운 처녀들 개나리 봇다리 짊어지고 무작정 상경하던 시절.
'구로공단 수출역군' 여공들이 저임금 직업병으로 고생한.. 시절.
콩나물 시루 같은 만원 대중교통과 남녀칠세부동석이 공존하던 시절.
우리나라 고유한복으로는 도저히 만원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던 시절.
'특히 여성은 활동적이면서도 간편한 옷차림이 필요했던 시절.'
고루한 유교사상에서 벗어나, 미니 스커트 붐이 일던 1960년 대 말.
남녀유별 금기가 깨져나가며 명동 거리에 불어온 미니 스커트 열풍.
1970년대 미니 스커트가 하늘 높이 치솟을수록 성풍속은 개방의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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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니 스커트 정도 여성 각선미 노출은 대수롭지 않다.
하지만, 1960년대 여성의 미니 스커트 옷차림은 충격적인 유행.
하여, 서울 도심 곳곳은 전설의 고향 '표모탄'으로 변해가는 듯.
한강 광나루에는 옛부터 표모탄(漂母灘)이라 불리웠던 전설의 여울.
10 년 수도 끝에 하늘로 오르던 신선이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의 고향.
그곳에서 빨래하던 여인 '표모'의 치마 속 다리를 엿보고 넋을 잃은 탓.
'신선도 떨어져 죽게 할만큼 매혹적인 각선미였을까?'
이조시대 사대부 가문의 여성의 다리 및 각선미 노출은 금기사항.
특히 고대 중국에서는 여성의 다리 뿐만 아니라 발의 노출도 금기.
우리나라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버선 위에 겹겹이 감싸 입었던 치마.
특히, 처녀들은 버선을 스타킹으로 치마는 미니 스커트로 바꿔 입었다.
'여성 옷차림이 바뀌자 성풍속도 하루가 다르게 급변.'
해 저문 공원, 숲속, 승용차에서 미니 스커트 옷차림 애정 행각.
인물 고운 명문 여대생들까지 은밀한 요정 아르바이트로 학비 마련.
기생 파티 일본 관광객들이 처녀의 순결을 소 한마리 가격으로 흥정.
요정마다 일본에서 몰려 든 기생파티 단체 관광객들로 붐비던 시절.
요정이 풍류 문화의 산실에서.. 밀 매음 거래 장소로 탈바꿈할 무렵.
한복 단장한 요정 처녀가 2차 나갈 때에는 미니 스커트로 화려한 변신.
여성들의 순결에 대한 가치관이나 도덕관념도 나날이 변해간다.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관한 고루한 관념도 서구적으로 바뀌어 간다.
은장도로 목숨걸고 지켰던 정절관념도 황금만능주의 앞에 무너진다.
아울러, 기생은 젊고 아름다움 자체가 상품 가치.
청초하고 순결한 매력은 가치를 논할 수 없을 정도.
...................... 여상십구(女相十俱)...............................
장목려안(長目麗眼) : 눈이 길쭉하면서도 눈매가 고와야 하고,
고비복두(高鼻福頭) : 콧날이 오똑하고 콧망울이 복스러워야 하고,
피윤옥골(皮潤玉骨) : 피부가 윤택하면서도 골격은 옥처럼 고귀하고
견부반원(肩部半圓) : 어깨는 반원을 그리듯 둥글어야 하며,
유두홍흑(乳頭紅黑) : 젖꼭지가 붉으면서도 검어야 한다.
둔부광구(臀部廣球) : 엉덩이는 둥글면서도 펑퍼짐해야 하고
운발비황(雲髮非黃) : 노란 머리가 아닌 비단결 머리카락이고
수족비대(手足非大) : 손과 발이 지나치게 커서는 안되고,
체격비거(體格非巨) : 몸체가 지나치게 커서도 안되며,
신장비이(身長非異) : 크도 작지도 않은 키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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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적 미모..............
'살결, 치아, 손'은 3 백(三白),
눈동자, 눈썹, 속눈썹 (三黑)
입술, 볼, 손톱은 붉으며(三紅),
키, 머리카락, 손가락이 길어야.
치아, 귀, 발 길이 (三短),
가슴, 이마, 양미간(三廣)
입, 허리, 발 (三挾).
팔뚝, 허벅지, 젖가슴 (三肥),
손가락, 머리카락, 입술 (三細),
머리통, 턱, 코(三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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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팔아 돈을 쉽게 벌려는 평범한 여성들까지 급격하게 늘어났다.
사회각층에서 우려하는 여론이 들끓자 풍기사범 단속 긴급조치 발령.
그 불문곡직 무차별 단속 탓에 애궂은 남녀 대학생들이 가장 큰 피해.
실적 올리기에 급급한 일선 경찰관들의 무조건 마구잡이 단속.
남성장발 가위로 깎고, 신여성 스커트 길이를 잣대로 재어 단속.
장발, 미니 스커트, 청춘남녀와 단속경찰들.. 숨바꼭질하던 시절.
머리가 귀를 덮으면 장발, 무릎 위 10 cm 미니 스커트는.. 경범죄.
애매모호한 단속에 반발하는 청춘남녀로 경찰서마다.. 붐비던 시절.
장발 삭발 당한 총각과 미니 스커트 처녀와의 '로맨스 산실' 유치장.
'미니 스커트 아래 무릎 꿇고 앉아 잣대질하는 경찰관.'
경찰관 앞에 고자세로 서서 무릎 아래를 내려다보며 항의하는 처녀들.
단속 벗어나려 경찰관 몰래 허리 풀어, 미니 스커트 끌어내리기 신경전.
그 신경전과 잣대질 와중 다툼 끝에 미니 스커트가 흘러내린 사례도 발생.
당시에는 팬티 스타킹이 드물었고, 밴드 스타킹이 주종을 이루던 시기.
미니 스커트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어도 그 안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미니 스커트 안에 복잡한 속옷을 격식 갖춰 입을 수 없는 유행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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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우리나라 성윤리를 뒤바꿔 놓은 미니 스커트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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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스커트......................
미니스커트 첫 작품은 1925년 프랑스 디자이너 폴 포와레
당시 은밀한 신체부위인 무릎을 드러내 일대 충격을 줬다.
1950년 영국 디자이너 마리 퀀트가 허벅지를 드러내며 유행.
1967년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귀국하며 국내에 소개
그녀의 첫 앨범집에 미니스커트 사진이 실리면서 유행.
1971년 미니 스커트보다 짧은 핫 팬츠가 럭키에서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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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스커트 붐이 일자 우리나라 여성들의 속옷도 간소화.
심지어 첨단 유행에 민감한 여성은 어지간한 속옷 착용 생략.
그 보일 수 없는 곳까지 여러 사람 앞에 드러내면 참을 리 만무.
'이조시대 윤리관이라면 여성이 은장도라도 뽑아야 할 상황.'
미니 스커트 처녀가 느닷없이 잣대질 단속경찰 뺨 때리기.
경찰과 미니 스커트 처녀 중 누가 풍기사범인지 알쏭 달쏭.
그당시 법이 가장 엄할 곳에서까지 사회기강은 휘청거렸다.
경제발전은 빠른 속도로 활성화 되었지만 성풍속도는 급변.
관광호텔마다 일본 관광객과 미니 스커트 요정 아가씨가 붐.
미니 스커트 옷차림에 놀라 세상 말세라며 혀차던 기성세대.
풍기문란을 엄히 다스린, 정치권 지도층에게 박수 치던 시절.
한강변 도로 차안에서 총 맞은 변시체로 발견된 아가씨.
1970년 3월 17일. 밤에 절두산 성당 앞에서 일어난 사건.
베일 속 요정의 실체가 대중에게 알려지는 사건이 터졌다.
고급승용차에 세련된 미모의 앳된 아가씨라 언론이 주목.
통금 야밤에 검문에 걸리지 않고 강변도로를 질주할 신분.
그녀가 전직 요정 아가씨였고 미혼모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사생아가 누구의 아이인가 또 다시 파문을 일으켰던 사건.
정인숙은 국내 3 대 요정 중 한 곳에서 술시중 들던 앳된 처녀.
그러나, 그 사건은 그당시 뚜렷한 이유없이 조용히 종결되었다.
.................정인숙 여인 사건의 전말................................
당시 그녀에 관해 매스컴에 밝혀진 사건의 전말은 간단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오후 7시까지 집에 있었다.
미혼모인 그녀의 아이 아빠가 외국 출장 중 걸려온 한통의 전화.
그 전화를 받고 그녀가 서교동 집에서 나가 찾아간 곳은 타워호텔.
그곳 주차장에는 위장 번호판을 단 20 여 대 검은색 차량들이 주차.
그당시 권력층 핵심인사들 차량이었고 그녀는 17층으로 올라갔다.
밤 8시 10분 경. 그리고, 10시 40분 경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사모님! 약속을 해 주시고 가셔야지요. 그냥 가시면 곤란해 집니다."
말없이 차에 탄 그녀가 운전자에게 청해 듣던 음악은 'Release Me'
'나를 놓아 달라'는 노래 가사가 그녀의 심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차는 시청 앞을 지나 신촌을 거쳐 서교동 그녀 집앞 골목에 들어섰다.
포장이 안된 어두운 골목. 자동차 헤드 라이트에 비친 건장한 두 사나이.
한 사람은 검은 잠버 차림, 다른 한 사람은 바바리 코트 차림이었다 한다.
평소 라면, 이 골목에 사람이 있을 리 없는 통행금지 직전인 밤 11시 40분
두 사나이는 승용차 문을 열라고 했다. 운전수가 유리창을 약간 내렸다.
당시, 창문을 통해 두발의 총성과 함께 남겨진 말. "안녕! 비너스!! 탕탕!!!"
그들은 운전 기사에게 절두산 성당 쪽으로 차를 몰도록 했다.
신음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가는 그녀를 실은 차.
제 2 한강교 인근 절두산 앞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
그리고, 그들은 사고 차량을 그곳에 두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정인숙 여인. 그녀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0 명 중에서 50명을 뽑고, 신원 조회를 통해 25명을 선출.
그중에서 미모 순으로 5명을 선출 후 다시 1등으로 뽑힌 재원.
권력자와 경제인들의 핵심으로 너무 깊게 들어갔던 댓가일까?
그당시 그녀에게 총을 쏜 사람은 친오빠인 운전기사로 알려졌다.
동생 불륜을 용서할 수 없어 동생을 죽이고 자살하려 했다고 했다.
오빠가 승용차를 운전하는 동안에도
뒷자리에서 벌어진 낯뜨거운 애정 행각.
그 추한 불륜행위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어
그녀에게 훈계 끝에 총을 쐈다는 운전자 진술.
평소 동생에게 운전기사 이상 대접 받은 적이 없어
서운했던 차에 우발적으로 살해했다는 진술이었다.
그러나. 불륜 상대방은 누구인지 끝내 밝히지 못한다.
'차안이 어두워, 미니 스커트만 보였다는 증언.'
참으로 아리송한 범행 진술은 오리무중 흐지부지 넘어간다.
그러나, 억울한 옥살이로 심경변화를 일으킨 그는 진술을 번복.
그의 진술은 설득력이 없어 보다 그럴듯한 시나리오로 사건 마감.
하여, 사건의 전말은 드러났지만, 그 진상은 오리무중.
그 전말이 밝혀진 이유도 정인숙 수첩에 적힌 명단 탓.
그 수첩 명단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베일에 덮혔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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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사체에서 발견 된 수첩' 명단 때문에 '육박전'.. 부부싸움.
정일권 국무총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대통령 경호실장 박종규
군 장성, 5개 재벌 그룹회장, 장관, 국회의원 등등 27 명이나 연루.
국민들은 믿었던 지도층에게 경악을 금치 못한 사건.
요정은 은밀한 정경 유착 산실로 뿌리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보이지 않는 치외법권 지대이기도 했다.
정인숙의 삶은 조선왕조 후기, 어우동의 삶과 닮았다.
마치 이조시대에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건 같았다.
어우동을 통해 정인숙의 삶을 재조명하는 것이 좋을 듯.
조선왕조 성종 후기에 고관대작 성풍속도 어지러웠던 난세.
성종은 규방 출입하다가 폐비 윤씨 손톱에 용안 긁히던 시절.
경희루 '흥청망청' 연산군 대에 이르러 갑자사화가 일어난 시대.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애정행각을 즐긴 내용도 있다.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로 종실 명문인 태강수에게 출가
외명부의 정 4 품 혜인(惠人)으로 봉작되었던 효령대군 손주 며느리.
어우동은 고관대작 지위고하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았던 여인.
팔촌 시숙 수산수(정종의 고손자)로부터 천민 '가파치'와도 간통.
자신과 관계한 남자의 몸 은밀한 부위까지 먹물 문신을 강요했다.
'이조시대 초기에는 천민 계급이나 중죄인도 꺼린 문신.'
그것은 그녀 치부에 문신을 새긴 태강수 및 남성 위상에 대한 보복.
기록에는 태광수가 어우동의 바람기를 막으려고 문신했다고도 한다.
어우동은 애욕의 노예로 전락한 남자들의 몸에 문신을 정표로 남긴다.
하여, 전의감 생도 박강창은 팔뚝에..서리 감의동은 등판에..어우동.
어우동은 유혹에 넘어간 사대부 양반들 몸에 문신을 새겨 천민 취급.
그 당시 이조 역사문헌엔 그녀를 성에 굶주린 음탕한 여인으로 기록.
기록에 의하면 , 병조판서 어유소, 직제학 노공필, 아전인 오종연..
과거급제 유가 길에 오른 홍찬은 어우동 때문에.. 신세 망친 사내들.
어우동에게는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번좌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결국, 낱낱이 드러난 어우동의 복잡한 애정행각.
도승지 김계창 탄핵으로 의금부 문초 끝에 사형.
의금부에서 고위관리들은 한결같이 어우동과의 관계를 부인.
박 정권 시절, '정인숙 여인의 사건' 검찰 조사에서도 마찬가지.
그 사건 하나로 '요정 정치의 산실' 실체가 세상에 들어났던 사건.
1979.10.26 '궁정동의 총성' 이후 김영삼 대통령 때 폐지된 안가.
'그때 그 사람' 사건은 정인숙 여인 못지 않은 후폭풍이 일어난다.
청와대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를 거쳐 요정 마담에게 이양된 실권.
구기동, 효자동, 창성동, 적선동, 청운동, 통의동, 팔판동, 삼청동.
청와대에서 반경 500 m 일대에 어디엔가 있었던 베일 속의 안가들.
그 중 궁정동 안가는 상징적으로 철거되어 시민공원으로 변모한다.
......................... 안가는 어떤 곳이었을까?.................................
YS 정권 이전까지 궁정동 한남동 구기동 청운동 삼청동의 안전가옥.
대통령이 사석에서 꼭 만날 사람이 있을 경우 연회를 열어 만나는 곳
외국에서는 대통령 암살에 대비해 침실을 바꿔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공식 행사는 경호실이 담당하지만 사적인 행사는 중정이 담당.
대통령을 둘러싼 각종 정보와 권력 분산이 이루어지는 비밀장소.
정치인, 고위공직자, 학자, 재벌총수와 자주 접촉하는 연회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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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시대에 와서야 안가를 헐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
그 이유는 자세히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밝혀진 사례를 살펴보자.
수출을 많이 했거나 큰 해외공사를 수주한 기업인을 불러 격려했다.
안가에 조리시설이 있었지만 모든 음식 재료는 경호실에서 준비했다.
연회에 참석할 다양한 직업의 여성은 몇 몇 마담이 100 여명 씩 보유.
마담이 추천하면 중정직원이 면접 후 외모와 경력을 따져 간택도 한듯.
간택된 여성은 초대손님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1회 참석 원칙
대통령이 한번 더 찾으면 만류를 건의한 적도 있었단다.
그러나, 추가로 딱 1번 만 더 접견하게 한 사례도 있었다.
퍼스트 레이디의 눈총을 외면할 수 없었을 법한 대목이다.
안가는 근본 취지에서 벗어나 운영이 된 경우도 있었던 듯.
여성 연예인은 그곳을 거쳐야만 인기를 누릴 수 있다는 루머.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던 안가.
안가는 정치권력과 스캔들에 관한 뜬소문 산실로도 여겨져 왔다.
........................정치권력과 스캔들의 유래..............................
진시황은 막강한 후원자 여불휘의 재력을 바탕으로 황제에 등극.
여불휘는 임신한 애첩을 진시황에게 받치고 훗날 진나라를 독차지.
진시황이 죽은 후 애첩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가 황제로 등극한 때문.
여불휘는 재상이 되어 막후에서 진나라를 실질적으로 섭정했던 인물.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속에도 권력다툼과 숨은 스캔들.
환갑에 가까운 황제에게 20대 양귀비와의 만남을 주선했던 내시.
첫만남에서 목욕하는 양귀비의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진 당 헌종.
원래 당 헌종의 며느리이자 그의 18번째 아들의 첩이었던 양귀비
황제의 귀비가 된 후에도 당 헌종의 동생과도 관계를 맺은 양귀비.
자신보다 나이 많은 수양아들 안록산과는 밀월관계로도 알려졌다.
안록산의 난 때 반란을 진압하려 양귀비에게 자결을 권한 당 헌종.
그녀를 잃은 슬픔 때문에 식음을 전폐하고 78세에 세상을 떠난다.
당 헌종이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힘 아닐까?
'자신의 성적 매력으로 당나라 실권을 장악했던 양귀비.'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매력으로 적마저 굴복시킨 이집트 여왕
자기 몸을 양탄자에 감싸 카이사르에게 선물해 왕권을 쟁취한다.
여러나라의 외국어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외교적 수완을 발휘,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두 로마 영웅을 유혹해 이집트를 이끈 여왕.
'에바 페론'은 잠자리 기교를 통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된 여걸.
스캔들이 남자에게 권력의 상징이라면 그녀에겐 권력장악의 수단.
10대 초반부터 남자를 사로잡을 비결을 몸으로 이미 터득했던 그녀.
그녀에게 버팀목이 될 장래성 있는 남자들을 사로잡는다.
가수, 영화 배우, 광고주, 사업가, 육군 대령, 정치가, 등등
그녀는 몸을 허락하는 대신에 원하는 것들을 하나씩 얻는다.
그녀는 24세 때 최고 권력자인 <후앙 페론>을 만나게 된다 .
<에바 마리아 두아르테>에서 <에바 페론>으로 바뀌는 그녀.
노동자와 빈민들 위한 정치를 펴며 최고 권력자까지 오른다.
'미국 대통령 중 최고의 바람둥이 <존 F. 케네디.>'
1953년 재클린과 결혼한 이후에도 마릴린 먼로, 앤지 디킨슨,
제인 맨스필드 등등 다수의 유명 여배우들과 프리실라 웨이어,
질 코완 같은 백악관 스태프들, 스트립 댄서인 블레이즈 스테어,
악명 높은 마피아 샘 지아카나의 정부 주디스 엑스너 켐벨 등등
우리나라의 기미독립운동에 힘을 실어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신혼여행 중에도.., 두번째 부인을 맞고도.., 부적절한 스캔들로 명성.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소아마비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스캔들 화제의 주인공.
아내의 비서, 자신의 비서, 백악관의 사무요원들은 물론,
2차 세계대전 때 백악관에서 기거했던 노르웨이 왕세자비
자신의 여성 운전사와 사랑을 나눴던 아이젠하워 대통령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지퍼게이트 사건으로 법정에 서는 수모
정치 권력과 스캔들은 보이지 않는 함수관계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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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가는 이조 관기제도가 되살아난 느낌을 주던 곳.'
YS가 1993년 2월 대통령 취임 후 그곳 철거는 업적 중에 하나.
1979.10. 26부터 1993. 2. 25 이전까지 막후의 정치 산실인 곳.
그 막후의 산실은 1993년 이후부터는 어디로 옮겨갔던 것일까?
훗날, 정인숙 여인의 아이가 청년이 되어 아버지를 찾으려 한다.
역사의 베일 속에 감춰진 마지막 의문이 풀리며 그 사건은 종결.
그러나, 정인숙 여인 사건의 배후 비밀까지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정인숙 여인의 친오빠는 살인죄로 19년 복역 끝에 출옥.'
어우동은 이조시대 남성우월 유교사상의 희생 양.
정인숙은 1970년대 돈과 권력에, 희생된 속죄 양.
감춰야 할 권력의 폐부를 드러낸 죄목으로 숨졌다.
김영한 보살은 '요정정치의 산실' 대원각의 천왕성모
그녀는 권력의 폐부를 가슴 속에 깊이 간직한 채 운명.
요정정치의 실세지만 그녀의 막후 역활은 아무도 모른다.
97. 12월 거림 길상사 개원집회에 참석한 4000명 中 유명인사들.
그녀가 정재계에 얼마나 영향력 있는 실세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공수래 공수거로 모은 재산을 공수래 공수거로 시주한 역사적 현장.
그녀와 뜻을 같이 해 수십억씩 돈 세탁까지 하며 우정출연한 기업들.
그녀는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며 살다갔다.
그녀는 우리나라 기생 역사상 전무후무한 본받을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녀의 삶은 본받을만 해도, 근대 정치사는 그녀의 치마 폭에 있었다.
그녀의 치마 폭에서 스러진, 세석평전의 철쭉꽃과 같이 고왔던 처녀들.
그녀의 영혼은 세석평전을 보며 영신과 같은 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뜬구름 같은 사랑과 부평초 같은 삶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있는 것을 다 털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그녀.
거림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삶'은 지리산의 전설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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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 당신은 누구십니까? - 도 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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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으로 오라 하셔서 강으로 나갔습니다
처음엔 수천개 햇살을 불러내어 찬란하게 하시더니
산그늘로 모조리 거두시고 바람이 가리키는
아무도 없는 강 끝으로 따라오라 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숲으로 오라 하셔서 숲속으로 당신을 만나러 갔습니다
만나자 하시던 자리엔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를 대신 보내곤
몇날 몇밤을 붉은 나뭇잎과 함께 새우게 하시는..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고개를 넘으라 하셔서 고개를 넘었습니다.
고갯마루에 한 무리 기러기떼를 먼저 보내시곤
그 중 한 마리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시며
하늘 저편으로 보내시는 뜻은 무엇입니까?
저를 오솔길에서 세상속으로 불러내시곤
세상의 거리 가득 물밀듯 밀려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단 사라지고 떠오르다간 잠겨가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상처와 고통을 더 먼저 주셨습니다 당신은
상처를 씻을 한 접시의 소금과 빈 갯벌 앞에 놓고
당신은 어둠속에서 이 세상에 의미 없는 고통은 없다고
그렇게 써놓고 말이 없으셨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는 지금 풀벌레 울음으로도 흔들리는 여린 촛불입니다.
당신이 붙이신 불이라 온몸을 태우고 있으나
제 작은 영혼의 일만팔천 갑절 더 많은 어둠을 함께 보내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황진이.
마치, 김영한 보살은 이조시대 황진이 같은 삶.
황진이 삶을 통해 김영한 보살을 재조명해 보자.
15세에, 동네 총각이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자 기생이 된 황진이.
뛰어난 시와 학문과 용모로 당대의 문인·유림들을 매혹시킨 황진이.
10 년 수도 생불(生佛)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해 파계시킨 황진이.
석학 서경덕을 연모하다 뜻을 이루지못하고 스승으로 모시게 된 황진이.
종친(宗親) 벽계수(碧溪守)와 교제하며 독특한 애정관을 시로 표현하였다.
대표적 시조<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산은 옛 산이로되>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어떠하리’
벽계수는 세종의 증손자인 영해군파 벽계도정(碧溪都正) 종숙(終叔).
황진이가 연모했지만 끝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그려진 벽계수.
일설에는 황진이가 말고삐를 잡고 이 시조로 유혹해 낙마했다는 벽계수.
대원각은 황진이 같은 기생으로 어떠한 부류의 벽계수들을 낙마시킨걸까?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 내어
봄바람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어 두었다가
정든 님 오시는 날, 밤에는 구비구비 펴리라.
<동짓달 기나긴 밤을.>은 이사종과 헤어진 후 심경이 담긴 시조.
3년은 이사종의 집에서 3년은 황진이 집에서 계약동거 후에 이별.
그후 이사종을 향한 그리움이 담겨진 황진이 작품 중 불멸의 명시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뭇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조.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길 바라는 남자들의 마음은 헤일 수도 없다.
그녀의 시조에는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는 강렬한 매력이 있다.
'그녀는 얼마나 많은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산은 옛 산이로되>는 서경덕의 죽음을 애도한 시조.
흠모한 남성에게는 당당하게 속마음을 드러낸 황진이.
서경덕을 떠나 보내는 마음이 싯귀에 구구절절 맺혔다.
박연폭포 서경덕 그리고 그녀 자신을 송도삼절.
그렇게 자부하며 당당하게 살아갔던 기생 황진이.
오늘날까지 세인에게 주목받을 만큼 매력적인 그녀.
오페라 연극 소설 작품들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그녀.
그녀의 일생은 그렇게 알려진 만큼 화려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녀에겐 스쳐 지나간 남자는 많았어도 평생 곁 줄 님은 없던 탓.
靑山은 내 뜻이오.
綠水는 임의 情이로다.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울면서 가는가. - 황진이.
후세에 알려진 그녀의 일생은 지나치게 미화된 것 같다.
그녀의 시조 내면에는 애욕을 자극하는 깊숙한 맛이 있다.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울면서 가는가.> 시조 구절이 사례.
'깊은 밤 지아비 부르는 그녀의 애틋한 울부짖음.'
그 매력이 못 남자들로 하여금 그녀를 못잊게 했다고도 한다.
그녀가 살던 방에서는 죽은 후 몇 년간 사향 냄새가 배였단다.
사향은 이성을 유혹하는 취음제로 환각제 같은 용도로도 쓰인다.
중종 6년에 태어나 갓 설흔에 숨진 그녀의 유언이 가슴 아프다.
그녀는 38세 운명 설도 있으나 언제 숨졌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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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뭇 남자들을 사랑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으니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지요.'
'제가 죽거들랑 금수도 관도 쓰지 말고
옛 동문 밖 물가 모래밭에 시신을 버려
개미와 땅강아지 또는 여우와 살쾡이가
제 살을 뜯어먹게 해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저를 경계 삼도록 해주시어요.' -황진이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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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죽을 때 자신과 같이 천한 계집은 길가에 묻어
자신의 무덤을 뭇 남성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해달라 유언.
당시 노장은 한스럽게 죽은 혼을 위로하는 정도의 장례방식.
그녀의 무덤은 실제로 송도로 가는 길목의 도로 변에 있다.
훗날, 과거 급제한 임제가 벼슬길에 그곳에 들러 애도의 시.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임제는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 관직에서 쫓겨난다.
벼슬아치로서 체통 없이 한낱 기생을 추모한 죄목
하여, 파면 당한 얼마후 임종을 맞으며 남긴 유언.
"내가 이같이 좁은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이로다."
황진이는 여타 기생들과는 남다른 에피소드를 남겼다.
이덕형 作 <송도기이>에는 황진이에 관한 기록이 있다.
"비록 창기이지만 몸치장을 일삼지 않았고
천금을 준다해도 시정잡배는 만나지 않았다."
화장을 한듯 만듯 해도 고운 자색이 늘 돋보였다는 황진이.
이사종과 6년 동거계약이 끝난 후 1년간 전국 방방곡곡 유람.
돈 떨어지자 스님에게 몸 팔고 잔치집에서 시 한수로 구걸연명.
산수유람 끝 무렵 나주에 들른 황진이의 해진 옷과 때낀 얼굴.
원님과 절도사가 벌인 잔치 자리에서 태연스럽게 이를 잡으며
노래 부르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한다.
'그당시 황진이는 왜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했을까?'
이조시대 기생의 존재 이유는 남성들의 성적욕망 해소도구.
그녀는 일부러 외모를 더럽게 하여 남성들의 욕정을 희석화
남성의 권위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육탄 공세로 남성 중심주의를 조롱하고,남성의 허위성을 폭로
예컨대 왕실의 종친 벽계수가 황진이의 재색에 초연하리라 장담
그녀의 노래 한 곡조에 정신을 잃고 나귀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
30년 면벽정진 생불 지족선사는 그녀와 하룻밤 정사로 파계승.
그렇다고 황진이가 모든 남성을 이런 식으로 대한 것은 아니다.
황진이가 맺은 참된 인간관계는 두 부류의 인간형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신분적, 성적 경계를 넘어 진실한 교감을 나누었던 서경덕.
서로의 존재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소세양과 같은 인격 높은 선비.
다른 하나는 예술혼이 서로 통했던 명창 이사종과 이언방 등이 사례.
소세양은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자부.
황진이 자태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호언장담
"내가 황진이와 한 달을 지낸다 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자신이 있다네.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보니 천하일색.
30일 동거후 떠나려 할때 황진이가 읊었던 시조.
이 시를 듣고 소세양은 결국 탄식을 하며 머문다.
“아!~~ 나는 사람이 아니다.”
<봉별소양곡세양(奉別蘇陽谷世讓) - 황진이.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
霜中野菊黃(설중야국황)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황진이는 모든 남성을 굴복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성품.
벽계수의 근엄함을 꺾은 뒤에 오는 메꿀 길 없는 허전함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아내로서 결혼생활에 대한 동경심
'이사종 집에서 3년, 황진이 집에서 3년간 계약 결혼.'
6년 간의 계약 결혼을 끝내고 미련 없이 돌아섰던 황진이.
오늘날 성행하는 동거계약보다 시대를 앞서간 듯한 황진이.
......................황진이.............................
이조 중기 개성 출신. 본명은 진(眞). 기명은 명월(明月).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이 없어 정확한 출생연도는 모른다.
야사로 추정해 보면 중종 6년에 태어나 중종 36년 경 사망.
미인단명이란 말처럼 그녀는 30세 전후 짧은 삶을 살다갔다.
중종 때 진사 서녀로 태어나 일찌기 사서삼경을 익혔다.
15 살 무렵 동네 총각이 그녀를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자
세상 남자들에게 사랑을 베풀 결심으로 기생이 된 여류시인.
뛰어난 시·서예·가창 재능 용모로
당대 석학 문인들을 사로잡았던 기생.
세련된 이미지와 매혹적인 언어 구사로
이조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시를 남긴다.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사로잡는 시와 미모와 춤사위.
지체 높은 사대부를 치마폭 아래 굴복시켰던 황진이.
유교사상 남성우월 사상과 신분벽까지 넘어선 황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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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500년이 지났어도 시대를 앞서가는 매력.
이 시대에도 여전히 고혹적 매력이 살아있는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에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비에 젖은 모시적삼에 속살 비친 고혹적 자태.
서경덕을 찾아가 유혹하다가 거절당한 황진이.
황진이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서 기다린다.
'결국, 서경덕과 하룻밤을 보내는 황진이.'
허나, 서경덕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 황진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온 이후 더욱 흠모.
서경덕은 그녀가 접했던 어느 남자와도 달랐다.
'끝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결국,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셨지만 일생동안 사모.
당대 최고의 지조와 미모로 명성을 날렸던 황진이.
먼훗날, 황진이는 고인 서경덕을 향해 속마음을 토로.
"몸 없이 어떻게 만나리이까?
제게 몸은 길과 같은 것이지요.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밟으며 그 길을 버리고 온 것 처럼
저는 한 걸음 한 걸음 제 몸을 버리고 여기 이르렀습니다.
사내들이 제 몸을 지나 제 길로 갔듯이
저 역시 제 몸을 지나 나의 길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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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를 그토록 애타게 한 서경덕,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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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우뚝 솟아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
올라와 보니 마음속의 눈이 끝도 없이 넓어지네.'
'험봉들이 춤을 추듯 연이어 솟은 봉우리들.
아득하기만 한 조물주의 공로 그 누가 알리오.
대지에 담긴 현란한 정기는 안개 비를 일으키고
하늘을 머금은 듯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
산은 다만 나를 위하여, 구름과 안개를 걷우어 내니
천리길 마다 않고 찾아온 정성이 하늘에 통한 것일까?'
'허공은 어떻게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일까? ' - 서경덕.
성리학 이치를 깨닫기 위해 반야봉을 찾은 서경덕.
아쉽게도 황진이는 반야봉을 유람했던 기록이 없다.
그러나, 반야봉의 고혹적인 산세는 황진이를 닮았다.
우리나라 여인의 전통 한복은 흐르는 선이 참 곱다.
특히 한복에 가리워진 여인의 자태는 환상속의 선녀.
황진이는 목욕하는 선녀같은 자태로도 서경덕을 유혹.
'그러나, 단 한차례도 뜻을 이루지 못한 황진이.'
결국 흠모의 정을 접은 남자를 스승으로 모신 황진이.
이조시대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불세출 절세가인 황진이.
그녀 유혹에도 흔들림 없던 서경덕이 반야봉에서 읊은 시.
황진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서경덕
14세에 서경을 읽고 태음력 계산을 스스로 해득,
18세엔 대학을 읽고 성리학 원리를 깨달은 인물.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 = 사생일여(死生一如)
노자 철학과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한다는 주장을 배격.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 선조 8년 우의정 추증.
1489∼1546(성종 20∼명종 1)조선 초기 학자.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이고, 본관은 당성
황진이가 스승 서경덕의 죽음을 애도하였던 시조.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 황진이
마야부인이 반야봉으로 떠난 남편 반야를 기다리는 듯.
기다림에 지친 마야부인의 심경이 담겨 있는 듯한 시조.
흠모했던 님을 떠나 보내는 마음이 구구절절 맺혀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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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을 흠모했던 황진이가 자랑삼았던 말 '송도삼절'.
송도삼절은 박연폭포와 서경덕 황진이를 일컫는 말이다.
황진이 스스로 한 말이지만 애틋한 사연이 전해내려온다.
서경덕이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
당대 석학 서경덕이 은거하는 초당까지 들어갔었던 황진이.
비에 젖은 모시 적삼 알몸 위에 드리운 듯.. 고혹적인 자태.
서경덕을 유혹하려 단단히 마음먹고 찾아갔던 황진이.
쏟아지는 비를 구실삼아 보내려 해도 가지 않던 황진이.
결국, 서경덕은 비에 젖은 그녀를 방안에 들어오게 했고,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벗게 했다.
황진이 옷을 벗겨주고 물기까지 닦아주던 서경덕.
서경덕은 이부자리에 황진이를 눕히고 몸을 말리게 한다.
그리고, 다시 글 읽기를 계속했고 날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빗줄기가 더욱 거세어져 그곳에 머무를 수 밖에 없던 황진이.
'밤이 깊어 삼경쯤 되자 황진이 곁에 누운 서경덕.'
행여, 유혹에 넘어가길 기대하며 기다렸던 황진이.
잠결인 듯 알몸 뒤척여 서경덕 품속에 파고들며 유혹.
그러나, 그녀의 애틋한 기대와 달리 무심히 잠든 서경덕.
'밤새 안타까워 잠못 이루다가 새벽녁에야 잠든 황진이.'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뜨자 이미 밥까지 차린 놓은 서경덕.
훗날 황진이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음식을 장만해 다시 찾는다.
그리고, 서경덕에게 절을 올리며 스승으로 모시게 해달라고 간청.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첫째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 셋째 바로 저올시다."
송도삼절(松都三絶)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다.
서경덕은 성리학자이고 뛰어난 사상가라지만 그 역시 남자이다.
그런데도 황진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선비의 절개를 지닌 남자.
황진이는 끝내 서경덕을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섬겼다.
황진이가 온갖 방법으로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던 서경덕.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도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했던 듯.
마음이 어린 후(後)이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잎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서경덕 -
'서경덕의 시조에 담긴 황진이를 그리는 속마음.'
부끄러운 일이기보다 오히려 순수하고 아름다운 현상.
서경덕의 시조는 누구인가에 의해 황진이에게 전해졌다.
그녀는 서경덕이 부른 시조를 전해듣고 곧바로 화답한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잎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 황진이
나도 그리운 것을, 당신이 나를 그리며 나뭇잎 소리를
내 발걸음 소리로 착각하는 것까지 내가 어쩔 수 있으랴,
그만큼 나도 당신이 보고 싶다는 황진이 마음이 담긴 시조.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니저 우러 예어 가는고.' - 황진이 -
평생 서경덕을 흠모하다가 죽도록 잊지 못한 황진이.
황진이는 의외로 남자같은 성격에 속이 탁 트인 기질
황진이는 반드시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스승을 방문.
서경덕의 거처에서 한껏 풍류를 즐기다가 돌아가곤 했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있으라 하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워하는 정(情)을 나도 몰라.. 하노라.'
위의 시조에는 서경덕의 속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듯.
아니면, 황진이 마음 속 희망사항을 담아낸 시조일까?
황진이 읊은 시조이지만 서경덕의 마음이 담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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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와 서경덕과는 어떠한 관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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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서경덕이 다 같은 남자인 줄 알았던 황진이.
허나 인격적으로 전혀 다른 경지에 있는 경이로운 인품.
그가 젊은 나이였다면 그녀는 끝내 연인관계도 꿈꿨을 듯.
황진이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 깊이 흠모한 서경덕.
그 마음속에 없는 줄 알지만 자신을 바치고 싶었던 황진이.
허나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황진이를 안타깝게 만든 서경덕.
'이승에서 단한 번이라도 자신을 바칠 수 있다면...'
평생 그리워하다 결국 마음깊이 간직해야 했던 남자.
시조나 가무음곡으로는 도저히 유혹할 수 없는 남자.
품에 파고들어 안아달라 애원해도 미동도 않던 남자.
'여자로서 그 부끄러움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애써도 황진이가 넘을 수 없는 태산준령 서경덕.
서경덕은 황진이가 지상에서 이루지 못했던 유일한 사랑.
황진이가 이승에서 다시 만나길 바랜 유일한 남자 서경덕.
........서경덕1489(성종 20)~1546(명종 1)............
할아버지는 순경, 아버지는 수의부위를 지낸 호번(好蕃).
송도(松都:지금의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양반이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
남의 땅을 부쳐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고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 이치에 몰두했다.
이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에 요양.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와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천거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속리산·지리산을 유람하며 기행시를 남겼다.
당시 선비들의 사화를 보고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 명으로 생원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사양.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 제수를 사양하고 성리학 연구에 전력.
이해에 병이 깊어지자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
〈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를 하여,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에 맞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
서경덕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 기철학을 주장.
그의 학설은 당시 주조를 이룬 이황 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서경덕은 우리나라 성리학 최초로 기일원론의 체계적인 전개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 1575년(선조 8)에는 우의정에 추증.
개성 숭양서원·화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화담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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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덕은 갑진년(1544) 겨울부터 계속 자리에 누워 있다가
병오년(1546) 7월 7일 새벽 서재에서 향년 58세에 운명했다.
임종할 때에 한 제자와의 일문 일답이 유언으로 전해져 온다.
"선생님, 지금 심경이 어떻습니까?"
"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지 이미 오래니 마음이 편안하다."
황진이는 수많은 남성편력 일화를 남긴 이조의 여인.
유교적인 관습으로는 비천한 사람이나 하는 짓을 자행.
심지어는 이사종이라는 선전관과 계약동거 했다는 기록.
처음 3년은 이사종 집, 나중 3년은 황진이 집에서 동거.
생활비는 각자 부담했고 약속한 6년후 미련없이 이별했다.
이언방은 명종 때 명창인데 황진이가 그 집을 찾아간다.
나는 이언방 동생인데, 형님은 지금 안계신다. 하지만,
나도 노래 약간은 하는데 들어보겠냐며 한 곡조 뽑는다.
"이언방 아니면 누가 이렇게 노래를 잘부르겠는가?"
황진이는 노래 잘하는 남자를 무척 좋아했던 듯 싶다.
선전관 이사종을 비롯 이언방을 찾아간 걸 보면 그렇다.
선전관이란 군사적인 왕명을 전달하는 제법 중요한 관직.
'당시 이조 관리 성풍속이 문란했던걸까?'
기생을 첩으로 삼는 행위는 이조시대라도 원래 불법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기는 나이가 50세라야 기역이 면제.
50세 이전에 기역을 면제 받으려면 왕의 특별 명령으로 가능.
예를 들면 세종은 종친 이순몽의 기첩 패련향에게 기역 면제
성종은 왕실 종친의 첩이 되어 아들을 낳은 기녀는 기역 면제.
왕의 특명으로 기녀를 신하에게 사급으로 주었을 경우 기역 면제.
이조시대에 관기를 관할하는 관직에 있으면 으례 기둥서방.
관아에 소속된 기녀는 우두머리 행수기생에게 복종해야 한다.
기녀는 아프거나 볼 일이 있을 때 호장의 허락도 받아야 한다.
기녀는 정해진 날짜마다 한달에 두 번 소집점검을 받아야 한다.
소집점검은 기녀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한 인원점검 제도이다.
수청기, 침비, 급수비의 직무를 부여하는 것도 호장 권한이다.
관기는 공물(公物)이라 여겼기에 생사여탈권도 관리들이 맡았다.
하여, 원님이 바뀌면 재산목록에 맞춰 관기 인원점검은 관례이다.
기녀는 기부(妓夫)가 있어야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기녀는 국록만으로 생활이 어려워 다른 경제적 수단이 필요.
기녀는 옷이 남루하면 장을 맞기에 후원자 기부(妓夫)가 필수.
'이사종은 황진이의 기부(기둥서방) 아닐까?'
황진이는 3년간 이사종의 집, 3년간 자신의 집에서 동거.
6년 후 관기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닐까?
이조 기녀 중 송도의 황진이는 창기이자 명기.
관기 제약을 받지 않고 스스로 창기가 된 기녀.
황진이는 스스로 계약 동거를 즐긴 것으로 보인다.
이조 기녀는 천민이지만 가무와 시서에 능한 교양인
경기(京妓)의 경우 보통 15세가 되어 기적에 오른 뒤
장악원(掌樂院)에 소속되어 기녀로서의 소양을 배운다.
교육과목은 가무 서화 대화법 식사예절 등등
특히 기녀들은 왕족(王族)이나 사대부를 상대.
예의범절은 물론 시문(詩文)에도 능해야 했다.
이조시대 시조문학에서 주목할 여류시인은 대부분 기생.
선비의 관념적인 풍류에 비해 기생은 숨김없는 서정 표현.
기생의 창작 시조들은 고려 가요의 맥을 잇는 진솔한 모습
유교의 엄격한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교양을 겸비한 기생.
찾아주는 사대부가 없을 때에는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여인들.
그녀들의 삶의 지주는 살겹게 찾아주는 양반 사대부가 전부였다.
하여, 그녀들의 시조에는 님을 향한 사랑의 갈구가 가득하고
떠나간 님에 대한 원망 내지 슬픔이 담겨 있을 수 밖에 없다.
기생을 '몸으로 말하는 꽃'으로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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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이사종과 동거생활을 끝낸 후 전국 유람.
이생은 황진이가 전국 유람에 동행한 재상의 아들.
혼자 유람하기 심심해 황진이가 이생을 부추겼던 듯.
단 둘이 금강산 유람하다 배고프면 절 음식 빌어먹기.
스님들에게 몸 팔거나 술자리 노래로 술과 고기를 얻기.
보리 흉년에는 곳곳을 유람하며 구걸로도 연명한듯 하다.
황진이는 금강산·태백산·지리산을 거쳐 나주에 도착.
중국 갈 사신 환송잔치에서 거지꼴로 가야금 타며 노래.
그곳 기생들을 주눅들게 하고 모인 손님들을 놀라게 한 일.
황진이는 1년간 이생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렸다는 기록.
고인이 된 서경덕의 발자취를 따라 전국유람을 한 듯 싶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추모하며 여생을 마감한 듯 하여 안스럽다.
'송도삼절 변하지 않는 황진이 절개가 실감나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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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때 황진이 매력은 전국적으로 소문났던 듯.
소세양이 장담한 말 -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
"황진이와 30일 살고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송도로 가서 황진이와 30일을 살고 떠나려한다.
이때 소세양을 그곳에 더 머물게한 황진이 시가 유명.
황진이 시 : '달 아래 뜰에는 오동잎이 다 지고'
소세양은 탄식한 말. -"나는 사람이 아니다."
소세양은 1486~ 1562년 이조판서
형조판서·병조판서를 거친 사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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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 황진이 -
왕실 종친 이혼원(벽계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시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벽계수 말고삐를 잡고 읊은 시조.
벽계수는 그녀 시조와 미모에 넋을 잃고 낙마했다는 일화.
벽계수는 효령대군 증손으로서 연산군 갑자사화 당시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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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에 숙청기생의 나이 한계는 20대였다.
30대가 되면 20대 사치 기생의 뒷바라지가 임무.
하여, 30대 나이에 접어들면 퇴물 기생으로 전락.
대부분의 기생은 30대 이후 비참한 삶을 살다갔다.
'황진이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걸까?'
황진이는 죽기 전 화려한 남성편력을 후회했다.
그녀는 자신이 죽고나면 시신을 성문 밖에 버려서
개미와 벌래들이 뜯어먹게 해 경계를 삼게하라 유언
고적한 산중보다 대로 변에 묻히기를 바랬다고 한다.
슬픈 곡 대신 풍악으로 장례를 지내달라 유언한 때문.
그녀의 무덤은 몇 백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 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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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임제는 서도 병마사를 제수받아 임지로 부임 중
황진이 무덤에 들러 그녀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남긴다.
오늘날 학생들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잘 알려진 시조.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은 어데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 임제 -
그런데 그 일이 조정에 알려져 부임지 도착 전 파직당했다.
양반이 체신없게 기생의 죽음에 슬펐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역시 당대의 지조 높은 선비인지라 벼슬에 연연하지 않았다.
..................백호 임제..........................
1587년(선조 20년) 백호 임제는 39세를 일기로 임종.
운명하기 직전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천하에 제왕을 일컫지 못하는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 만 끝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했으니,
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리라.
그러니 내가 죽거든 곡(哭)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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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는 죽고나서도
거처 간 남자들의 마음을
무척이나 설레게 했나 보다.
1587년 백호 임제는 39세를 일기로 임종
1592(선조 25)~ 98년 임진왜란 7년 전쟁
황진이는 1570년 대를 풍미한듯 추정된다.
황진이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입적했다.
황진이 기생이 되자 전국 풍류객들이 송도에 몰려들었다.
그당시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 기생이 있었다 한다.
'이조 500년 역사상 가장 시조가 뛰어난 기생.'
황진이가 살면서 겪어온 남자들은 세 가지 타입이었다.
첫째는 황진이을 탐하려고 자신에게 직접 달려오는 남자.
둘째는 겉으로 무심한 척하며 속으로는 몹시 탐하는 남자.
세째 수행하며 아예 쳐다보려고도 만나지도 않으려는 남자.
황진이는 세째 타입의 남자는 직접 찾아가 굴복시켰다.
황진이는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신을 좋아하는 모든 남자를 위해 살겠다는 파격적인 선언
학문과 지식으로 유명한 남자들을 다 자신의 치마폭에 넣었다.
기생은 이조시대에 여덟 천민계층에 속하는 낮은 신분
사노비, 광대, 무당, 백정, 상여꾼, 공장, 승려, 기생,
그러나, 시와 서예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대접받는 존재.
황진이는 고루한 유교 가치관을 깨고 파격적인 삶을 살다갔다.
반야봉은 그녀의 삶을 상징하듯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속치마 같은 구름바다 위로 솟은 둔부처럼 고운 반야봉 쌍곡선.
황진이가 불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를 파계시키는 장면 같다.
그녀의 다리 사이 아래로 지족선사를 기어가게 만드는 도도함.
첫대면에서부터 그녀를 냉대한 지족선사에 대한 응징이었을까?
비에 젖어 속살이 비치는 한복을 입고 지족선사를 찾아간 그녀.
어쩌면 그녀는 뭇 남자들이 만들어낸 동경의 인물인지도 모른다.
남성을 굴복시키고 마는 매력과 신비로운 운명과 고혹적인 자태.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도 그녀의 유혹대상일 뿐.
천마산 청량봉 아래에 지족암으로 지족선사를 찾아간 날,
유명한 황진이가 찾아온 사실이 황망하기가 그지없었을 듯.
산에서 불공만 드리던 스님에겐 눈부시게 아름다웠을 황진이
바로 쳐다볼 수 없어 벽만 바라보고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 마음을 꿰뚫어본 그녀는 스님을 더 유혹하고 싶었을까?
"스님. 저로 인해 상사병에 걸려 죽은 총각이 있나이다.
남자들은 마음에 둔 여자를 못 잊어 죽을 수도 있나이까?"
'과연 소문난 미모..저 정도면 상사병 걸릴 만도..'
지족선사는 황진이 요염한 자태에 넋을 잃었을 듯..
산사의 밤이 깊어질수록 지족선사는 참지 못했을 듯..
그녀를 덥석 안은 지족선사는 새벽녘 암자를 내려왔다.
"십년공부 나미아비타불"은 지족선사로부터 비롯된 속담.
기생.
19세기 평양기생에 관한 ‘녹파잡기’기록.
평양 기생 67명의 재주와 특징을 기록한 책.
경연과 화월 색향(色鄕) 이야기가 흥미롭다.
"노을빛 치마는 바람에 날리고
구름 같은 그녀 머리는 드높다."
의자에 걸터앉아 선비에게 버선을 신기게 한 기생
경연(輕燕)에게 버선을 신기며 귀공자 선비가 한 말.
"일찍이 봄날의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비단 주렴을 걷어 달빛을 방으로 들인 그녀.
쓸쓸한 감정을 주체 못하며 나를 보고 반겼다." - 선비.
"달빛은 밝고 밤 바람은 맑아요.
이렇게 멋진 밤을 어찌하면 좋지요?"
- 화월 색향(色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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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과 함께 중앙과 지방의 관아에 기녀를 배치한 이조.
관청의 행사와 관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필요했다.
따라서 관기가 기방을 차리고 손님을 받는 일은 이조 후기
기녀는 한양에 거주하는 경기(京妓)
각 고을의 지방기(地方妓)로 나뉜다.
기녀의 수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
연회를 자주 연 연산조때 기녀 수는 크게 증가
한때 한양에 머문 기녀 수가 만 여명에 달했다.
목(牧), 부(府), 군(郡), 현(縣) 등
행정구역에 따라 기녀 수가 정해졌고
평양과 같이 유명한 색향(色鄕)은 200명
규모가 작은 행정구역에는 20명 정도였다.
기녀제도는 이조의 유교관과 사회질서에 상반
이를 폐지하자는 논의가 이조 초부터 활발했다.
그러나 기녀제도가 관리들의 처신에 직접 관련
그 때문에 폐지는 당시 현실로서는 불가능했다.
“전국의 기녀제도가 폐지되면
관리들이 옳지 못한 방법으로
일반 가정의 여자를 범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벌받게 될 것
하여 기녀제도 폐지는 안된다”
오늘날 윤락가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려는 인식과 유사.
결국, 이조 통치이념과 상반되면서도 구한말까지 유지.
관기란 여악(女樂), 의녀(醫女), 창기(娼妓), 등
이들은 천인으로 국가에 소속된 공노비와 같은 존재.
기적에 올려지면 천민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기녀.
양반과 혼인해도 그 아들은 노비, 딸은 기녀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기녀의 신분은 관아에 예속된 채 세습.
늙거나 병들어 기녀 역할을 못할 때는
딸이나 조카를 대신 들여보내야 했으며
혹은 돈을 바치고 속량되는 경우가 아니면
평생 벗어날 수가 없어 대부분 모녀가 세습
그외 일반 백성이나 양반이 기녀가 되기도 했다.
흉년이 들면 흔히 여자아이는 기녀로 팔려갔으며,
역적 집안의 여자들이 강제로 기녀가 되기도 했다.
기녀의 활동기간은 15~50세인데 어린 기녀를 동기(童妓),
나이 든 기녀를 노기(老妓), 퇴역한 기녀를 퇴기라 불렀다.
체계적 교육을 받고 활동한 관기는 한양에 거주한 경기(京妓).
이들은 어린 나이에 기녀 교육을 시작하기도 하지만
보통 15세면 기적에 올라 장악원 소속으로 본격 수업.
글씨, 그림, 춤, 노래, 악기연주, 시, 책읽기, 대화법,
식사예절 등 타인을 대하거나 즐겁게 할 때 필요한 것.
이들이 상대한 부류는 왕족, 고관, 학덕 높은 유생
그러므로, 예의범절은 물론 문장에도 능해야 했다.
기녀 한명마다 담당선생이 지정되었고
악기 하나는 전문적으로 배우게 했다.
교육 내용에 대해 수시로 점검했고
실력이 향상되지 못하면 벌을 받았다.
하여, 한양 기녀는 뛰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재주는 중앙에서 가르치면 충분
인물에 있어서는 지방 출신도 필요했다.
하여, 지방기 중 출중하면 한양으로 발탁
옥 같이 흰살결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춘 정갈한 얼굴
이런 미인은 각 지에서 선발해야 수요를 채울 수 있었다.
교육을 마친 후 용모와 재주에 따라 1패, 2패, 3패 3등급
1패는 왕과 고관이 도열한 어전에 나가는 최상급 기녀
2패는 관아와 고관집에 출입하는 기녀, 3패는 하급 기녀.
3패 기생은 일반 백성들과도 상대하는..오늘날 공창 역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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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양반사회에서는 축첩, 기생, 간통, 강간이 성행.
특히, 기생제도는 양반 남성들이 성적욕구 돌파구였다.
이조 양반들은 성리학과 유교관을 추구했던 윤리적 관념
축첩제도는 공인되었으나 여성의 투기는 칠거지악으로 금기.
여성은 남편 아닌 자와 성관계를 맺으면 벌받던 불균형 사회.
어우동에 앞서 어우동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유감동(兪甘同).
유감동은 세종 때의 실존인물이고 그 아버지는 검한성 유귀수,
남편은 평강현감 최중기, 감동은 당당한 사대부 양반기문이다.
만약, 그녀가 평민이라면, 남성 편력은 사건화 되지 않았을 듯.
사건이 처음 보고된 세종 9년 8월17일 <실록> 자료에 의하면,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아내 감동을 데리고 갔다.
밤길에 그녀를 겁탈한 김여달은 그녀의 집까지 찾아와 강제 통정.
그후, 병을 핑계로 한양에 올라 온., 유감동.
방종을 일 삼자 남편 최중기가 버렸던, 사건.
그녀가 관계한 남자는 이승 황치신 전수생 김여달 이돈 등 40 명.
그 외 이름을 숨긴 간통자 역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사건은 세종 9년 9월16일에 종결될 때까지 거의 두 달을 끌었다.
총제 정효문, 상호군 이효량, 해주 판관 오안로, 前 도사 이곡
장연 첨절제사, 사직, 부사직, 판관, 찰방, 현감, 등의 벼슬아치.
수공업 기술자인 공장 수정장, 안자장, 은장(銀匠)과도 애정행각.
이효량은 감동의 남편인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감동과 간통했다.
정효문은 숙부 정탁이 감동과의 간통사실을 알면서 감동과 관계
물론 정효문은 정탁과 감동과의 관계를 몰랐다고 변명으로 일축.
40 여명과 간통한 유감동을 어떻게 되었을까?
세종 9년 9월16일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쳐 개가한 여인.
즉, 유감동이 최중기와 부부로 살 적에 김여달과 첫 간통
남편과 함께 자다가 소변을 본다며 달아나 김여달에게 갔다.
하여, 그녀의 형량은., 중형벌
간통죄로 곤장 100 대 + 10 대.
그녀가 유부녀였기에., 10대 추가.
간통했던 남성들은 가벼운 처벌
곤장 40대, 곤장 100대, 태형 50대,
파면 등 다양한 판결을 내린., 사헌부.
유감동은 겁탈당한 후 두문불출해야 마땅.
그러나, 수치심도 모르고 오히려 방종의 길.
그것이 당시 사헌부에서 내린 유죄 판결 내용.
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창기라고 행세하며
수십명 사대부와 관계를 맺어 장안에 소문이 파다.
그녀가 수치심을 더욱 더 갖도록 옷을 벗기고 때렸다.
유감동 사건은 원래 김여달의 겁탈에서 비롯된 사건
김여달은 어두운 밤 무뢰배와 작당하여 거리를 순찰.
유감동이 조사의 아내인 줄을 알면서도.. 위협과 공갈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 밤새 희롱하여 비롯된 사건.
모든 잘못은 김여달의 강간행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유감동이 김여달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후 상황은 달라졌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오늘 날 관점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판결
이조시대에는 미혼남녀의 혼인전 관계도 간통죄 처벌.
유감동은 양반에서 8천민으로 전락., 변방 관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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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 혹독한 수련을 감래해야 했던 어린 기생들.
폭포수 아래로 잠수하기, 거꾸로 매달리기, 외줄타기
춤사위, 시조, 노래, 악기, 예절, 등 기본 수련 과정.
...........여기소 전설..............
생극면 소재지 신양리에서 5㎞
음성 기점 19㎞ 지점에.. 여기소
약 20 평 너럭바위는 옛 선비들의 선유처(仙遊處)
어느해 여름 경기도 광주땅에 선옥이란 예쁜 기생
이곳 폭포수를 바라보며 줄을 타다가 몸을 날린 소.
선옥은 천하에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기생.
그녀는 노래도 잘했지만 시작(時作)도 일품이었다.
한가지 흠이 있다면 얼굴 어딘가에 어두운 그림자.
그 때 이 곳에 지나가다 잠시 쉬어 가게된 노승
은밀히 그녀를 불러 그녀의 죽음을 예고해 준다.
"얼굴을 보니 곧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살아나고 싶으면 내일 칠장사를 찾아오라"
"그 운명을 알고 있으며 피하고 싶지 않으니
마음 편안함이 고요한 대해(大海)와 같습니다.
그러니, 뜻은 고맙지만 스님은 염려 마십시오"
노승이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선옥이는 여러 선비들 앞에서 줄타기
폭포 중심으로 못(沼) 양쪽 나무에 줄을 맨다.
선옥이는 하얀 치마 저고리에 흰 버선을 신고
줄 위에 오른 모습이 한 마리의 백학과 같았다.
선비들은 넋을 잃고 그녀의 춤사위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침은 고사하고 숨소리마저 죽인 선비들.
한번 지나가고 돌아가는 순간 몸을 날린 그녀
그녀가 물속으로 곤두박질치자 경악한 선비들
하얗게 솟구치며 끓어 오르는 폭포수 속 물거품.
그녀의 시체가 떠오른 것은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상처 한 군데 없는 그 아름다운 얼굴
흡사 생전에 얼굴처럼 온화스러운.. 혈기
기생이 죽은 웅덩이라 하여 여기소(麗妓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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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 계곡에도 여기소.
'비구니 사찰' 백화사 가는 길목에 있는 여기소.
이조 사대부들이 기생과 풍류를 나눴다는 피서지.
이곳도 기생이 죽은 웅덩이라 하여., 여기소.
기생이 연회 도중에 자살 했음을 뜻하는 여기소.
그러나, 이곳에 얽힌 전설은 맥이 끊어진듯 하다.
여기소란 지명만 죽은 기생의 애환을 대변하는 듯.
오죽 했으면, 살 길을 버리고 죽음을 택했을까?
백화사 뒷편에는 이조왕조 내시들의 공동묘지.
비구니 사찰 백화사는 이조 왕조의 궁녀 은둔지.
백화사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기자기한 비경
개울가에는 기생과 풍류를 즐길만한 너럭 바위들.
백화사 계곡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커다란 동굴.
동굴 안에서 은밀히 솟는 샘물은 '여인의 상징'인듯.
남근처럼 우뚝 솟은 용출봉.
그곳 동굴에서 발원한 여기소.
잊혀진 전설이 아쉽기만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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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4대 진흥왕 때 여무적(女巫的) 직능의 유녀화(遊女化)
화랑의 원화(源花) 또는 고려 시대부터 발생하였다고도 한다.
이밖에 전쟁 포로 부녀자의 노비화, 사노비의 매음녀화(천관녀)
신라시대의 가척(歌尺) 및 여악(女樂) 제자의 유녀화(遊女化) 등
고려 문종 때 팔관연등회 여악(女樂)이 관기(官妓)의 시초
여악은 창기희(唱技戱)로 발전해 이조시대 들어와서 활성화
태조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많은 관기가 따라갔다.
이조시대 관기 설치목적은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
관기는 의녀(醫女) 약방기생, 상방(尙房)에서 바느질 담당
상방기생은 연회 때 노래 춤 거문고 가야금 등 악기도 능숙.
관기는 지방관아 지방관의 위락(慰樂) 대상
성종 수양대군 연산군 양녕대군 안평대군 등
역대 군주 및 왕족들은 기생을 즐겼던 인물들
이들 기녀들의 지방 가무(歌舞) 특색으로
안동기(安東妓)의 송대학지도(誦大學之道),
함흥기(咸興妓)의 송출사표(誦出師表),
관동기(關東妓)의 창관동별곡(唱關東別曲),
의주기(義州妓)의 치마무검(馳馬舞劍),
제주기(濟州妓)의 주마지기(走馬之技),
평양기(平壤妓)의 창관산융마시(唱關山戎馬詩),
북청기(北靑妓)의 치마지기(馳馬之技),
영흥기(永興妓)의 창용비어천가(唱龍飛御天敬)
중종 때 의녀(醫女) 창기(娼妓)의 연회 참여를 금지
1510년 중종은 연회 때 의녀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
그러나 이러한 왕명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기생을 관장하는 기관으로는 기생청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가무 행의 시 서화(書畵) 등을 가르쳐
그들이 대하는 상류층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켰다.
기생청은 후에 권번(券番)으로 개칭되어
서울 평양 기생학교에 15~20세 처녀를 입학
가음곡 예의 서예를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서울 ·평양 ·
성천(成川) 해주 강계(江界) 함흥 진주 전주 경주
시(詩) 문장으로 유명한 명기로는
황진이(黃眞伊) 매창(梅窓) 소백주(小柏舟)
의기(義妓)로 유명하기는 평양의 계월향(桂月香),
진주의 논개(論介), 가산(嘉山)의 홍련(紅蓮) 등.
기생제도는 이조시대에 발전해 자리를 굳히게 되어
신분상 천민이지만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특이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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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들은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경기 중앙 관청에 소속된 기생은
보통 15세가 되어 기적에 오른 뒤
장악원에 소속되어 기녀 소양을 학습.
교육과목은 가무, 서화, 대화법, 식사예절 등
타인을 대하거나 즐겁게 할 때 필요한 것이었다.
이들이 상대하는 부류가 왕족을 포함한 사대부들
예의범절은 물론 시문에도 능해야 했다.
기녀 중 창가에 속한 명기가 수없이 배출
송도 창기 황진이, 부안 창기 계랑이 그 예
기생은 천민임에도 불구하고 이조 시대 패션을 선도.
대중의 의복에 크게 영향력을 끼친 '유행의 선도자'.
금은 수식과 능라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기생의 의복
옷감은 중국제 비단을 비롯한 고급 소재를,
색상도 붉은색, 노랑색 등 화려한 색상과 수
신발도 가죽신에 수를 놓은 화려한 신을 착용.
금은으로 된 노리개와 일체의 장신구 등을 사용.
머리치장도 높이 얹어 화려하고 사치한 머리 장식
남성 눈을 끌기 위해 여성적 매력을 드러낸 차림새
저고리 길이는 가능한 짧게 입어
흰 치마에 허리 일부가 나오게 하고,
겨드랑이 살이 살짝 보일 정도로 입었다.
한편 아래로는 치마 밑에 많은 속곳을 입어
풍성하게 보이도록 하여 Erotic을 강조했다.
유교사회에서 남녀 내외법에 의해 썼던 쓰개
이들에게는 형식적이고 장식적인 쓰개로 사용.
신분 높은 사대부 및 풍류 묵객들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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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風流)란 속되지 않고 운치가 있는 일.
<삼국사기> 진흥왕이 설치한 화랑제도 기록.
최치원이 화랑 난랑을 위해 쓴 난랑비 서문 중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3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풍류.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 나라에 충성하는 것
공자의 가르침,
노자의 종지(宗旨)
석가모니의 교화사상.
신라 유불선(儒佛仙) 3교 이전 가치관
또 풍류의 수련자들이 바로 화랑이었다.
화랑의 교과목 3가지
① 도의로써 몸을 닦기,
② 노래와 춤으로 즐기기,
③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기.
고려 궁중의 연중행사 팔관회
양가의 자제를 뽑아 춤과 노래
고려 풍류 문화가 이조 때 계승.
고려시대 음악과 노래에서 제외된 노래.
이조시대에는 음악 만을 풍류로 일컫는다.
시문(詩文)·음주가무·청담(淸談) 등을 즐기는 풍류.
선비들의 우아한 태도나 생활을 풍류라고도 일컬었다.
이조 때 풍류는 예술에 의한 탈속성과 술에 의한 무아경
신라 화랑 문화가 이조시대에 들어와 변질된 풍류.
남무(男巫). 창우(倡優). 유녀(遊女). 무동(舞童).
술을 마시고 여자들과 질탕하게 노는 뜻으로 타락.
기생이란 해어화, 유녀, 노는 계집, 의녀,
기녀, 예기. 의기. 은근짜. 탑앙모리, 창기,
여사당, 현지 처, 색주가(작부), 창녀, 갈보,
양공주. 등 시대에 따라 다양한 호칭.
기생이란 곧 몸 파는 여성을 뜻한다.
이조 유림들이 세종대왕에게 상소한 관기제도 폐지.
기생 때문에 추한 반목과 유흥 폐해가 적지 않은 탓.
훗날 좌의정까지 지낸 청백리 허조(1369~1439)는 반대.
"남녀관계는 인생의 큰 욕구 중 하나라 금할 수 없다.
관기를 없애면 인재들이 어염집 처자를 범해 벌받는다"
'중종 때 대사헌 조광조(1482~1519)는 여악 폐지를 주장.'
당시 관기로 인한 퇴폐풍속을 고치려다 반대의견에 부딪쳐 좌절.
1945.8.15 해방후 성매매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처벌했지만 실패.
수요와 공급이 맞고, 성매매에 대해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한몫.
2004년 11월 23일 성매매 처벌법이 시행후 성매매 논쟁이 다시 가열.
인신매매.감금 성매매를 엄벌하고, 성매매가 근절돼야 한다는 공감대.
그러나, 문제는 성매매를 줄일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 무엇이냐는 것.
2004년 한국 형사 정책 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매매 산업 현주소.
총 규모는 연간 24조원으로 국내 총생산(GDP)의 4.1%를 차지한다고 한다.
매춘여성은 33만명이지만 성매매 종사자는 150만명이란 여성단체도 있다.
고려 이조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기생문화는 정치와 외교의 산실.
성종, 연산군 시절 기생문화는 왕족, 양반들의 위안물이었을 뿐 아니라,
두만강 6개 진에 파견해 병사들을 달랬고, 외교사절에겐 관기를 제공했다.
'이조 후기는 관기로 외교를 유지해야 할 만큼 정권 밑바탕이 취약.'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듣는 꽃'으로 슬프고 가련한 천민이다.
한 여사당의 노래인 <여사당 자탄가>는 이들의 신세를 잘 보여준다.
한산 세모시로 치마저고리 예쁘게 차려 입고
안성 청룡사로 줄타기 놀이를 하러나 가세나
이 내 손은 문고리인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
이 내 입은 술잔인가? 이놈도 핥고 저놈도 핥네
이 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놈도 타고 저놈도 타네.
-조선 해어화사 中에서-
구한말 대원군은 평양기생을 나라의 3대 병폐로 지적한다.
평양기생이 어떤 존재였기에 나라의 일인자가 지적했을까?
평양은 옛부터 기름진 옥토로 모든 것이 풍부한 천혜의 땅
옛 벼슬아치들은 평양기생과 멋지게 놀아보는 것이 꿈.
나중에 정신을 차리면 땡전 한 푼 남아나지 않을 망정.
벼슬아치라면 평양으로 발령받는 그 자체가 소원이었다.
평양은 이조시대에 첫손가락 꼽는 색향으로 명성 높았다.
예전에 개성은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가 많아 송도(松都)
평양은 흐드러진 유흥을 상징하는 버들이 많아 유경(柳京)
개성에는 절개과부가 많고, 평양에는 풍류기생이 많았다.
평양은 명기의 고장이라 한양기생을 주로 공급하는 고장.
18세기에는 80 여명 정도였지만 16세기 말에 약 180 여명
평안감사로 도임하면 기녀들 200 여명이 길가에서 영접.
마치, 꿈속에서 도원경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평양은 대동강가의 경치가 일품이고 어여쁜 기생도 많아,
평안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그만 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
평양은 예로부터 중국과 이조 사신들이 오가던 길목
하여, 평양기생이 유명해진 것은 지리적인 특성 때문.
관기는 대부분 인물이 곱고 재주 많은 천민 소녀 출신.
이조시대에는 기녀 양성소 교방에서 특별 교육을 시켰다.
기생들은 공식적으로 1년에 백미 한 섬을 연봉으로 받았다.
그러나, 연희에 불려가 몸 팔아 받는 해우채가 주 수입원.
하여 풍류양반 중 기생에 빠져 가산탕진하는 일도 비일비재
'이춘풍전' 이서방이 재산을 기생에게 빼앗기는 소설이 대표적.
이와 반대로 몰락한 사대부를 입신양면 시킨 기생도 있다.
임진왜란 때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자결한 의기 계월향.
훗날 시인 한용운은 계월향의 의기를 높이 평가하는 말을 한다.
“나는 황금의 소반에 아침 볕을 받치고 매화 가지에
새봄을 걸어 그대의 잠자는 곁에 가만히 놓아드리겠오.”
선조 때 시재에 뛰어나 천재칭송을 받았던 임제(林悌)와
화담을 나눈 평양 기생 한우(寒雨)를 먼저 손꼽을 만하다.
한우와 술잔을 나누던 임제가 슬쩍 한우의 마음을 떠본다.
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雨裝)이 업시 길을 나니
산(山)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 비 맛잣시니 얼어 잘까 하노라 - 임제 -
어이 얼어 자리 므스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 한우 -
지금도 평양 예술단원 여성들의 미모는 세계적으로 유명.
평양 기생은 사내들이 애간장을 태우며 한번 보기를 열망,
구미호가 환생한 여인처럼 한번 빠져들면 패가망신할 정도
만석군의 전답이 다 들어가도
그 흔적 조차 없다는 평양기생.
만석 전답보다 넓다는 한치 그곳.
'한일합방 후 구한말 기생문화는 일대 변화.'
일제시대 들어와서 미도리마치 등 유곽제도가 번창한다.
그 시기에도 식민지 여성들에게 번성했던 뼈아픈 기생문화.
한반도의 기생 풍류문화는 일본 게이샤 전문직업으로 탈바꿈.
...................일본 기생 게이샤.......................
'화려하지만 슬픈 여인' 게이샤는 일본기생
남자를 즐겁게 해주는 전문직업 여성 게이샤.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과는 달리 슬픈 운명.
낡은 2층 목조 가옥의 게이샤 촌 교토(京都).
집집마다 창문이 잠긴채 주렴까지 드리워 있어
밖에서는 도저히 안을 들여다 볼 수 조차 없다.
1751년 교토에서 처음 선 보인 게이샤는 원래 남자.
아직까지 일본에서는 게이샤와 매춘녀를 엄격히 구분.
게이샤는 고객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 금기 사항.
고객과 잠자리를 같이 해도 절대로 돈을 받지 않는다.
게이샤의 고객은 일본 정, 재계의 실력자들이 대부분.
일본 여성들은 주로 가난을 벗어나려고 이 길을 택했다.
이들은 남편에게 팔렸거나 버림을 받았던 창녀의 딸.
하지만 출신 한계를 극복하고 훈련을 통해 삶을 개척
스스로 살아 있는 인간 문화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게이샤는 철저하게 남자 기호품이 되려 노력.'
새하얗게 분을 바른 게이샤의 얼굴은 백지 화폭과 같다.
게이샤는 아름답지만 슬프게도 자신의 고유 이름이 없다.
게이샤가 되면 개인 신상에 관한 모든 것이 지워지기 때문.
새하얀 얼굴, 새빨간 입술, 펄럭거리는 넓은 소매의 기모노
골짜기처럼 굽이치는 아름답고 단정한 머리모양을 한 게이샤.
몇 시간 무릎꿇고 앉아 고통스러워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꿇어앉는 자세는 일본 여인들에게도 상당히 힘든 일이다.
게이샤는 잠잘 때 머리 모양을 유지하려고 높은 목침 사용.
그들은 다도 전통무용 사미센 연주 전통가요 서예연습을 한다.
게이샤는 재력이 든든한 사람이 고객으로 걸리기를 바란다.
게이샤의 평균 나이는 40세 이상이고 80세 고령에도 일한다.
당신의 마음은 수시로 변해, 언젠가 나를 배반하겠죠
당신의 그림자 속에 나는 그저 꼭두각시처럼 있을 뿐이죠
사랑의 끈으로 제발 나를 묶어 주세요. - 게이샤의 노래 -
오늘밤 나를 찾아온 손님과 함께 긴 복도를 달려 딸깍,
빗장을 닫아 걸고 오직 한 사람 만을 사랑하게 되었네
그러나 이제 돌아가야 하네 나의 외로운 안식처 침묵속으로
딸랑딸랑 야경꾼이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게이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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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8.15 해방 이후 자취를 감춘 게이샤 문화.'
1947년 공창제도 폐지령으로 기생 및 공창제는 맥이 끊겼다.
1950. 6.25 사변 이후 미군이 주둔하며 기생 문화는 주춤한다.
그러나, 미군부대와 관광산업은 유곽촌과 기생문화를 부활시켰다.
'이태원, 미아리 텍사스, 청량리 오팔팔, 기생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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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녀 제도는 고구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의 유녀에서 비롯, 관기가 전국 관아에 배치
그러나, 삼국시대 이전에도 기녀가 있었던 듯 싶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
신라 초 진흥왕 무렵 원화제도, 백제 '꽃쟁취'라는 유녀
우리나라 기녀 역사는 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특히 고구려가 정벌한 부족들의 부녀자들이 유녀로 전락
그러나, 유녀가 관기가 된 때는 중앙집권이 정착된 고려때.
이조때는 기녀 이외에 유녀 집단이 존속되어 유녀금론이 대두
이조때 기녀란 원칙적으로 관기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기녀란 가무 기예를 익혀 나라에 필요할 때 봉사하던 여인
따라서,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신분 상 천민에 속했다.
관기는 또 경기(京妓)와 지방기(地方妓)로 나뉘어 졌으며,
지방기 중 자색이 뛰어나고 재주가 있으면 경기로 뽑혔다.
경기 중에는 내의원 혜민서에 속해 있는 의녀가 있고,
공조상의원에 침선비가 있었다. 즉 내외법이 엄격해져
부녀들의 질병까지도 남자 의사에게 보일수 없게 되자
그 임무를 대신 맡게 된 것이 의녀로서의 기녀였던 것.
침선비는 왕과 왕비의 의복을 짓는 일을 하는 기녀였다.
그러나 이들은 약방기생, 상방기생 또는 선상기도 겸했다.
의녀들은 주로 궁중에서 비빈, 나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연산조에 들어와 일반 관기와 함께 연회에도 참석시켰다.
나중에 의녀들의 궁중 연회 참석을 금지 시키려 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 이들은 이조 말까지 진료와 가무를 병행.
민간에서는 이조 중엽까지 창가비라는 성비와 가비가 있었다.
기녀들은 젊고 아름다웠고 남성들의 접근이 허용되는 존재였다.
기녀는 관아에 소속된한 노예로서 세습되었고,
일단 기적에 오르면 평생 빠져나올 수 없었다.
기녀는 열다섯 살부터 쉰살까지 있었는데,
어린 기생은 동기, 나이가 든 기생을 노기.
열다섯 살이 되어 기생명부에 오르면
교방에서 음률을 익히면서부터 기녀의 길
일정 교습기간이 끝나면 행수기생이 엄한 제재
기생 안배는 주로 호장이 맡아 했기에
아전과 기녀는 떼려야 땔 수가 없는 관계.
기녀의 옷차림은 이조 여인들 옷차림에 상당한 영향
기녀는 매우 사치하고 요란스런 복장을 즐겼 입었다.
비록 창기라 하더라도 모두 능라 비단이 허용되었다.
즉, 기생의 능라비단 옷은 양반 여인과 동등한 예우.
그러나 궁중연회에서 국빈을 대접할때에는 흑색 옷만 허용
대궐에서 가무를 맡은 정재의 옷은 붉은색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겹치마 사용은 금지되었으며 옷소매는 일자형이었고,
치마도 오른편으로 여미게 해서 양반 부녀와 구별했다.
단 약방기생쯤되면 예복으로 녹의홍삼에 큰머리를 하고,
고름에는 침통을 찰 수 있는 이례적인 대우를 하기도 했다.
기녀들은 일반 부녀자와 달리 속곳을 치마밑으로 노출
또 저고리 길이를 짧게해 치마 허리가 드러나게 입었고
이 치마 허리에는 갖가지 화려한 수를 놓아 멋을 내었다.
또한 남자의 눈길을 끌려고 속곳을 노출시켰지만
속곳을 겹겹이 껴입어 둔부를 부풀려 매력을 강조.
고쟁이 위에 속바지를 입고, 그 위에 단속곳을 입었다.
속곳을 겹겹이 껴입어 임신을 했어도 감추기에 적당.
겹겹이 껴입은 속곳은 남자를 애태우는데 매우 효과적.
사치노예 기생의 옷차림은 일반 부녀자에겐 부러움의 대상.
즉, 기생들의 겨드랑이 살이 보일 만큼 짧은 저고리
평민 부녀자들에게까지 유행처럼 번져나가게 되었다
기녀들의 옷차림을 일반 부녀자들이 은근히 동경하여
본받으려는 일반 부녀자 때문에 사치가 날로 심해지자
이조 중기에는 사치를 금하는 여러 금제조항이 내려졌다.
장신구 역시 기녀들에게는 예외적으로 많이 허용되었다.
후덕함을 강조한 일반 부녀자들의 몸치장은 규제한 반면
마음껏 사치를 누린 기생은 일반 부녀자에게 선망의 대상.
기생은 전통사회에서 술자리 시중을 들던 특수계층 여성
이조시대 한량들은 '말하는 꽃'이라는 뜻으로 '해어화(解語花)'
원래, 기생은 고대 부족사회의 무녀(巫女)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일제 치하에서는 국내외 고관 연회에 참석하는 '사상기'도 등장.
기생은 국제무대에까지 활동무대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생 문화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권번이라 불렀다.
광복 후 권번은 폐지되었고 제도적인 기생도 사라지게 되었다.
'요정(料亭)’이란 '요리집'이란 뜻의 일본식 표현.
구한말 기생이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바뀌었다.
하여 기생을 관할하던 기생청은 사라지게 된다.
그대신 들어선 권번이 기생들을 교육시키고 관리
세금을 부과해 기생의 직업화와 양성화 유도
그 후, 2차대전 막바지에 권번도 폐지되었지만
그 이후 기생집, 방석집은 고급 술집의 대명사
6·25와 5·16을 거치면서 요정이 성행하기 시작.
고위급 관료들이 요정에서 술마시며 국정을 논의
요정은 한때 밀실 정치의 산실로서 알려지게 된다.
선녀.
단군의 7 선녀는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선녀.
단군이 7선녀와 함께 신선이 된 성지가 참성단.
참성단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참성단......................
강화 마니산 참성단(塹城壇)은 단군(檀君) 성지이다.
마니산(摩尼山)은 숭고하고 거룩한 성산(聖山)이란 뜻.
'고려사지리지'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리산으로 표기
마리산으로 부르기 전에는 '머리산'(頭嶽)으로 불렸으며
백두산(白頭山)이 '흰머리산'이라는 점에서 밀접한 관계.
마니산(469m)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918개의 계단을 통과
참성단은 7선녀가 전국체전때 성화를 채화하는 곳
참성단은 한라산과 백두산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니산 참성단 기록은 발해 대야발 作 단기고사(檀奇古史)
"제1세 단제 단군왕검께서 단기 125년 7월5일
3남인 부우를 강화에 보내 전등산(傳燈山)에
삼랑성을 쌓게 하시며, 제천단을 마니산에 쌓고
하느님께 제사하시니 동방민족의 제사하는 풍속은
시조 단제(檀帝)때부터 시작되었다" -(단기고사)
이 기록은 국내 역사학계에 공인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니산 참성단은 단군유적으로 알려진 곳.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왕들이 하늘에 제사
따라서, 참성단을 천제를 올리던 우리나라 첫 제단
참성단은 몇 번 중수(重修)한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다는 기록
이조 인조 17년(1639) 단이 허물어져 보수.
숙종 26년(1700) 5월에 다시 보수하였는데
현재 보존된 강화유수 최석항이 세운 중수비
역대 왕조가 거행했던 이곳 참성단의 행사
고구려 유리왕 19년 사슴 돼지를 제물로 제사
백제 비류왕은 몸소 현지에 나와 제사를 지냈다
7선녀의 유래는 단군께서 단을 쌓아 제천할때
신녀(神女)가 합그릇을 받들고 있었다는 기록
.................................................
고조선 시대에 신녀(神女)는 왕의 여자
불교가 성행하며 선녀는 옥황상제의 시녀.
이조시대에는 나무꾼과 선녀 전설 속 인물.
이조시대 선녀의 신분전락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시대의 자유분방한 목욕 풍습 때문인듯.
나무꾼과 결혼하는 여자로까지 신분 상 전락.
송나라 서긍이 썼던 고려 방문기를 살펴보자.
.................고려도경.........................
"고려 풍습이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날엔 하루 2번씩 시내에서 많이 목욕한다.
남녀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구비 따라
몸을 벌거벗되 그 누구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
물이 부족해 목욕을 즐기지 않은 중국인들
목욕을 거의 안해 전염병의 온상이던 유럽
고려에서는 유독 청결한 것을 즐겼던 모양.
목욕은 몸을 청결히 하는 목적도 있지만,
마음의 때와 죄를 씻는다는 정화의 목적.
신라 때 사찰 목욕탕에서 모두 함께 목욕.
선녀는 옥황상제의 시녀라는 불교적인 관념.
사찰 공동목욕탕에서 남녀 구분없이 목욕한듯.
이조 유교관 정착후 차츰 혼욕 풍습은 사라진듯.
사찰 공동목욕탕에서 몸과 마음을 씻는 혼욕 풍습.
이조 유교관 영향으로 사찰 공동목욕탕도 사라진듯.
그러나, 사찰 주변 개울가 목욕풍습은 전해져 왔던듯.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
옛날에 사냥꾼에게 쫓긴 노루를 구해준 마음 착한 나무꾼.
노루는 생명의 은인인 나무꾼이 장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선녀의 목욕장소를 가르쳐 주고 날개 옷을 감추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아이 셋 낳기 전에 날개옷을 돌려주지 말라고 당부한다.
나무꾼은 노루가 가르쳐준 선녀들의 목욕장소로 간다.
그곳에 숨어 하늘나라의 선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나무꾼은 그곳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나무꾼은 노총각이 되도록 여자를 만난 적조차 없던 탓이다.
나무꾼은 집에 돌아와서도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녀들 중 나무꾼의 마음을 사로잡는 선녀가 있었기 때문.
그후 나무꾼은 선녀들이 목욕할 때 그 선녀의 옷만 감춘다.
나무꾼이 숨어 엿보던 선녀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선녀의 옷.
선녀들은 목욕을 한 후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
날개옷을 잃어버린 그 선녀는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고 남는다.
하여, 나무꾼과 함께 살게 된 그 선녀는 아이 둘을 낳게 된다.
선녀는 나무꾼과 함께 살면서도 늘 수심에 찬 나날을 보낸다.
선녀는 나무꾼과 살면서도 하늘 나라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나무꾼은 선녀의 수심 가득찬 얼굴을 볼 때마다 늘 미안해한다.
선녀의 수심 어린 얼굴을 볼때마다 나무꾼은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던 어느날, 나무꾼은 선녀에게 날개옷을 돌려줄 결심을 한다.
나무꾼은 선녀인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무꾼으로부터 날개옷을 돌려받은 선녀는 몹시 행복해한다.
선녀는 날개 옷을 입고 두 팔에 아이들을 안고 하늘로 날아간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간 선녀는 나무꾼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무꾼는 노루의 당부를 지키지 못한 어리석음을 뒤늦게 후회한다.
'아이가 셋이라면, 두 팔로 다 안고 하늘을 날지 못할텐데..'
이때 다시 나타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두레박 위치를 알려준 노루.
노루의 천기누설 보은 덕분에 그 두레박을 타고 가족과 극적 상봉.
나무꾼은 행복을 누리지만 지상에 남은 홀어머니가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나무꾼은 홀어머니를 뵈러 지상에 내려온다.
차마 홀어머니를 두고 하늘로 오를 수 없었던 나무꾼.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아들 나무꾼은 지상에 남는다.
천마에서 내리지 말라는 금기를 어겼던 나무꾼.
결국 지상에 남게되었다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
.................................................................................
중국에서는 선녀에 관한 전설이 우리나라보다 드물다.
중국에서는 선녀같이 아름다운 여성을 소녀라고 부른다.
소녀경은 미혼 여성에 관한 옛 중국인의 관념이 담겨있다.
................소녀와 처녀의 차이점과 소녀경...................
소녀(少女) : 어리지도 않고 성숙하지도 않은.. 여자 아이.
소녀(小女) : 처녀가 자신을 윗사람에 대해 낮춰 일컫는 말.
처녀 (處女) : 미혼 여성으로서 총각과 대칭되는 낭자(娘子).
아직 이성(異性)과 성교(性交)를 한 적이 없는 숫처녀 여성.
일이나 행동을 처음으로 할때 한자어와 어울려 복합어로 사용.
처녀지 / 처녀 출전./ 처녀 출판./처녀 비행/ 등등으로 쓰인다.
소녀경 : 방중술의 극치와 성 이론에 관한 지침서
정신적인 결합과 전희, 남성의 절도와 여성의 성욕
9 체위와 30 가지 성기교 그리고 건강을 위한 8 체위
남자와 교접함에 있어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 기분을 안정.
남자가 준비가 안되어 있으면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여자는 흥분을 억누르고 남자의 준비 정도에 맞게 임해야 한다.
여자 혼자 흥분하여 요동치면 음정(陰精)이 고갈되기 쉽다.
음정이 고갈되면 그 곳이 텅비어 풍한(風寒)의 병을 얻는다.
여자는 남자 외도를 알고 질투로 번민하면 몸이 야위게 된다.
소녀경은 중국 고대 방중술과 질병치료에 관한 경전.
전설 상의 황제가 소녀(素女)라는 여자와 나눈 대화록.
인간본성에 기초한 음양론과 자연에 바탕을 둔., 오행론
건전한 성생활을 권장하고, 신선이 되는 방법을 설파.
불로장생의 비법을 담은 도가 철학서이자 의학서였다.
우리나라에서 소녀경은 외설적인 음서(淫書)로서 인식
10 세기 중반 일본 단바 야스요리가 편집한 소녀경 영향
원본 소녀경은 청나라 고증학자 섭덕휘가 편찬한 소녀경
단순한 방중술의 기록이 아닌, 동양의학 성생활의 지침서.
...................................................................................
..................선녀(仙女) 와 천사 (天使 : angel)..............................
人 + 山 = 仙 = 사람이 산에 오르면 신선이 된다는 의미의 한자이다.
人 + 谷 = 俗 = 사람이 계곡에 가면 세속에 물든다는 세속 속과 대칭.
谷 = 계곡 곡 = 계곡의 산세 또는 여성의 성기를 본따 만든 한자이다
선녀는 옥황상제의 시녀를 일컫지만 한자로 풀이하면 산에 사는 여자.
천사(天使)는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수호하는 영적 존재.
영어 angel 어원은 그리스어 ggelos(使者)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천인 선인(仙人) 천녀 선녀 등등의 표현.
천사는 미술작품에서는 날개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
좋은 일을 권장하는 천사는 여성이나 어린아이 형태로 표현.
......................................................................................
중국에서는 여성의 백옥같은 피부를 아름다움으로 여긴다.
신분이 높은 여자일수록 아름다운 피부를 유지하려 애썼다.
깊은 산속의 맑은 물 목욕을 피부 미용법으로 여긴 듯 싶다.
하여, 지체 높은 신분 여성이 입었던 비단 옷이 선녀의 날개옷.
그 목욕을 엿 볼 수 있는 남자라면 산속에 사는 나무꾼 아닐까?
하여, 선녀같은 여자의 자태에 반해 감춘 비단 옷이 날개옷일 듯.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서민층 총각은 결혼하기가 어려웠다.
지배계층 축첩 제도로 서민 총각이 결혼할 여자가 귀했던 탓.
신부감을 구하려면 신부 집에 그 댓가를 치뤄야 하는 혼인제도.
혼수 비용도 만만하지 않아 노총각으로 늙는 경우도 많았다 한다.
중국은 지금도 붉은 비단 이불 깔린 침실 벽을 선녀도로 장식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선녀가 벽에서 걸어나올 듯 한 그림이다.
터질 듯 부푼 젖가슴 끝 붉게 발기된 유두에서 헤어 누드까지 묘사.
애욕을 주체할 수 없는 듯한 선정적인 여성의 알몸이 생생한 선녀도.
침대에 반쯤 누워 고운 자태를 뽐내 듯 요염하게 흘리는 선녀의 미소.
여성의 피부같이 보드라운 비단 이불에 몸을 감고 바라보는 선녀도.
'날개옷을 벗어버린 선녀도'에 빠져 잠자리의 허전함을 메꿨을.. 男心.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선녀가 이상적인 미모의 여인상인 듯.
한반도에서 선녀에 관한 사고방식은 목욕하는 처녀.
굳이 더 아름다움을 표현하면, 옥황상제의 시녀 정도.
우리 민족에게는 옛부터 선녀는 애욕의 대상이 아니다.
산속에서 목욕하는 처녀는 선녀처럼 고왔을 듯.
그럴 경우에 선녀에 비유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한반도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은 중국에서 유래.
'우리나라와 중국의 선녀 관점이 다른 이유...???'
중국은 '선녀도'로 침실 벽을 장식하는 풍습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녀도 그림 조차도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에서 선녀는 미녀의 상징이고 한반도는 숭배의 대상.
우리나라에서 선녀의 개념은 옥황상제의 딸 또는 시녀.
고대국가 이전부터 모계사회였던 것이 그 밑바탕인 듯.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에는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
이승에서 행복한 결말이 없는 <나뭇꾼과 선녀의 전설>
몽골리안의 조상 '백조처녀 신화'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아이 셋으로 선녀를 붙잡아 두고 싶은 남성의 독점욕.'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의 몽골 브리야트 족의 백조 신앙.
생명은 설원에서 태어나, 설원으로 되돌아 간다는 믿음.
그 믿음 탓에 바이칼 호수 일대의 민족은 흰 옷차림 일색.
................바이칼 호수의 백조처녀 전설....................
깃옷을 벗고 여자가 되어 헤엄치는 호수의 백조 세 마리.
사냥꾼은 그중 하나의 깃옷을 감춰 날아가지 못하게 한다.
여섯 아이를 낳고 살던 백조 부인은 나무꾼에게 애원한다.
"날개 깃옷을 저에게 되돌려 주세요."
어느 날, 소주를 빚어 사냥꾼을 취하게 한 후 또 다시 애원한다.
그 옷을 내어주자 아내는 다섯 아이를 데리고 하늘로 날아갔다.
그녀가 천신 에세게 마란의 딸, 남은 아이가 브리야트인족 조상.
백조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여기서 유래.
............................................................................................
백조 처녀 이야기는 유럽 몽골, 시베리아, 중국과 일본까지 공통.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백조가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떠나는 것.
한가지 다른 점은 사냥꾼은 천기누설이나 금기가 없다는 대목이다.
더 중요한 점은 사냥꾼과 백조처녀 사이의 한 아이만 지상에 남는 점.
백조처녀의 전설은 곧 브리야트족이라는 민족의 탄생신화.
천신의 딸과 사냥꾼이 헤어져야만 브리야트족이 존재 가능.
즉, 브리야트 족은 인류의 조상을 '백조 처녀'라고 믿는 셈.
한반도는 농본국가였기 때문에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
몽골과 일본은 유목민 생활 관습 탓에 '백조처녀 전설.'
우리나라의 선녀전설
사냥꾼은 나무꾼으로..
백조는 선녀로 바뀐다.
'백조의 깃은 날개옷.'
우리나라에서 사랑받는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
백조처녀 전설 때문에 각광을 받는 '백조의 호수'.
덧 말.
수면 위에서는 우아한 모습으로 떠있는 백조.
수면 아래 두 발로 온갖 오두방정을 떠는 백조.
백조는 여성의 내숭을 뜻하는 수사어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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