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로 띄우는 편지 / 이형권
지금은 향로봉산맥에 묶여 있습니다.
지난해는 금강산 아래 애꾸미 바다에서 살았습니다.
손에 잡힐 것 같은 일출봉이랑 옥녀봉이랑 구선봉이랑
말무리 반도에 떠 있던 해질녘 눈부시게 빛나던 흰 섬 여섯 개
수평선 너머 막막했던 마음도 울었습니다.
밤새 아무 말도 잇지 못한 채
그대는 이승의 가장 먼 저쪽에서 서성이고
이슬처럼 숨죽인 어둠의 초분 곁에서
대답없는 날들은 수레바퀴처럼 밀렸습니다.
멀리 청진 앞바다로 간다는 화물선 몇 척
길게 불빛 울음으로 떠올라 제갈물릴 때
해당화 붉디붉은 물보라처럼 가슴만 태웠습니다.
칠석날 오작교를 그리면
어둠을 질러 더 큰 오작교로 나오고
비바람 속 무지개를 그리면
새색시처럼 쌍무지개 띄우고
얼굴도 모르고, 목소리도 모르지만
난생 처음 이렇게
슬픈 사랑을 시작한 우리
저곳은 배가 잘 뒤집힌다는 해하도 근처
저곳은 북두칠성이 내린다는 만물상 바위
말무리반도 발밑까지 비춰주면
너는 송도 앞바다
명호리 옛터까지 불밝혀주고
해일이 일어 순찰조마저 잠든 밤
부르기도 전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빛 찬란한 신호 속에서
난생 처음 이렇게
슬픈 사랑을 시작한 우리.
쓰러질 것 같은 사랑을 지켜준 것은
머나먼 설산에서 피어난다는 에델바이스 꽃이었습니다.
쓰러질 것 같은 사랑을 더욱 슬프게 한 것도
머나먼 설산에서 피어난다는 에델바이스 꽃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불안의 깊이만큼 눈은 내리고
사랑의 기억마저 묻혀지는 철책너머
오늘도 눈부시게 에델바이스 꽃이 피었습니다.
처음 그대의 깨끗함을 사랑하였고
그대의 순결함을 자랑으로 살아왔습니다.
얼어붙은 전투호 영하의 처마 밑에서 그리운 편지를 적어
북풍 눈발처럼 날려 보냅니다.
그대가 정녕 옛 맹세를 저버린다 해도
봄 강물의 따스한 숨결로 사랑하겠습니다.
그대여, 길길이 눈보라에 덮여 장벽과도 같던
저 산맥이 우리들의 희망입니다.
저곳은 우리들의 출발, 모든 싸움의 진지가 되었습니다.
나는 산 넘어 산 넘어 망루에 올라
별빛 그림자를 밟고 맨발로 걸어오실
그대를 한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 이형권무심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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