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연가 / 이형권
은행나무 아래
가을이 노랗게 물들었다
비단옷에 치자물이 배이듯
우듬지에서 시작된 마음이
발목까지 환하게 물들었다.
멀리서 그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저렇게 물들어 갈 수 있다면
어둠 속에 홀로 선 가을밤도
외롭지 않으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물들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이냐
그대를 향한 마음이
나무처럼 우뚝 서 바라볼 수밖에 없을 때
사랑은 바람결에도 실려 오고
이슬비에도 묻어와
내 마음의 배후를 밝힌다.
세상의 많은 존재 중에서
종말의 시간을 견뎌온 빛깔
그대가 아지랑이처럼 내 안에서
황금빛으로 피어나던 날은
세상의 은행나무가
어찌하여 온몸으로 물들었다
온몸으로 저물어 가는지
하늘의 별처럼 또렷해졌다.
가을에는
미혹되지 않는 마음들이 고백하듯
파란 하늘 위에 눈부신 연서를 쓴다.
세상의 어느 모퉁이에서
내가 그대에게 물들었듯이
그렇게 깊어지는 생각들이
노란 은행나무 이파리처럼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 괴산 읍내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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