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적산방도白積山房圖 / 이형권
어느 날 내 마음이
한없이 백적산방으로 갔다
강진군 대구면 항동 천개산 아래
백적산방은 내 마음 속에 그려진
작고 쓸쓸한 거처와 같다.
무자년 겨울이었다,
나는 아무 기별도 없이 그곳으로 갔다.
햇볕에 일렁이는 칠량 앞바다가
수없이 파문을 내며 흔들리는 오후였다.
해변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늙은 팽나무가 홀로 지키고 선 용문리 앞
길이 끊기고 저수지 둑이 막혀 있었다.
산허리를 감고 도는 숲길에 들어서니
흰빛을 드러낸 바위산이 우뚝하고
성긴 대숲이 자리한 저수지 너머 우묵한 곳을
촌로는 황처사가 살았던 곳이라 가리킨다.
다북솔 우거지고 맑은 시내가 흐르는
먼 산을 바라보기 좋은 아득한 골짜기
서른 살 무렵 시인 황상은 이곳에 들어 와
평생 밭을 갈며 살았다.
마당에는 치자꽃 몇 송이가 향기롭고
설화지 바른 창문 너머 솔바람 소리가 가득했다.
스승은 곧고 향기로운 유인(幽人)의 집이라 했고
제자는 좁쌀같이 작은 산방이라 했고
나는 흰빛이 쌓이는 은자의 터라 한다.
세상의 일들은 티끌처럼 사라져 버리고
구름과 안개와 노을만이 깃들었다 가는 곳
누에를 키우며 송엽주를 따라주는 아내도 없이
길손은 또 황무지 같은 빈터에
삶의 행장을 꾸리고 싶었다.
사립문을 열고 찾아올 사람도 없고
국화꽃도 저 버린 지 오래된 날들
앙상한 나뭇가지에 바람만이 세차게 분다.
옛집은 이미 무너졌고
산그림자 머물던 정원도 사라진 세월 저편에서
알 길 없는 그대의 소식을 생각하다가
구슬프게 옛터를 바라보나니
그대여 이제 우리 곁에 다시 무엇이 남아서
훗날을 기약할 수 있겠는가
좋은 시절은 바람처럼 흩어져 버렸으니
이제 누가 있어 이슬 젖은 아욱을 꺾을 것이며
어느 세월에 누렇게 익은 조를 밤새워 찧을 수 있겠는가.
'▒▒▒▒▒※※☆▒▒ > 이형권무심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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