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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일은 저 하기 나름이다

나무향(그린) 2013. 9. 26. 05:41

모든 일은 저 하기 나름이다
몸이 청성에 있으면
청성 땅에 침 뱉지 않는다네

自爲靑城客 不唾靑城地
자위청성객 불타청성지

- 유의양(柳義養, 1718~?)
 『북관노정록(北關路程錄)』

 

  
  이 글은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촉(蜀) 땅 청성현을 유람하며 지은 「장인산(丈人山)」 시에 나오는 구절로서, 조선 후기의 문인인 후송(後松) 유의양이 『북관노정록』에 인용한 글입니다. 『북관노정록』은 유의양이 함경북도 종성(鐘城)으로 귀양 가면서 도중에 경유한 북관(北關) 여러 고을의 노정, 풍토, 유적 등을 사화(史話), 관련 시문과 함께 기록한 한글로 쓴 기행기입니다.

  함경도를 북도 혹은 관북지방으로 일컫는데, 마천령(摩天嶺)을 경계로 해서 서쪽은 남관(南關)이라 하고 동쪽은 북관이라 합니다. 당시 북도에 대한 글 가운데 홍의영(洪儀泳)의 『북관기사(北關紀事)』를 보면, “남관만 해도 산천과 풍물이 기전(畿田 경기)과 대동소이하나, 일단 마천령을 넘으면 산은 더욱 높고 험준하며, 들판은 더욱 황량하고 넓으며, 민물(民物)과 풍속도 판이하다.”라고 하고, 또 “양반이라고 칭하는 자들이 있어 혹 글을 읽어 행실을 삼가는 자들이 있긴 한데, 그 나머지는 모두 벼슬길로 나갈 기회를 엿보는 자들로서 기껏해야 향임(鄕任)이나 무관 반열에 들어가는 것이 큰 욕심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지리적인 여건이나 학문의 풍토 등이 다른 지역에 비해 여러모로 열악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종성은 북관 중에서도 두만강변에 위치한 변방 지역으로 서울에서 이천 리나 되는 곳입니다. 북관에는 여진족 등 오랑캐가 수시로 드나들어 폐해가 심하므로 세종 때에 육진(六鎭)을 설치하였는데, 종성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곳에서 귀양살이하는 유의양에게 한 선비가 찾아와서 글을 배울 것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소생이 북도에서 생장하였기에 학식과 문한이 노둔하니 부끄럽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유의양은, “몸이 청성에 있으면 청성 땅에 침 뱉지 아니한다 하거늘, 사람이 스스로 학문하지 않고서 어찌 생장한 땅을 탓하리오? 하늘이 사람에게 성품과 재능을 주심에 어찌 반드시 남방에 후하게 하고 북방에 박하게 하였겠는가?”라 하고, 북도 출신의 충신, 열부(烈婦), 문한(文翰)에 능한 이, 글씨로 유명한 이 등을 일일이 지명하였습니다. 또 이것을 기록하여 그곳의 다른 선비들에게도 전하게 하였습니다.

  종성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것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나옵니다. 북도 음식은 대체로 먹기 어렵지만, 염장(鹽醬) 맛은 더욱 형편없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유의양이 종성에 올 때도 함흥 판관이, “육진의 염장이 맛이 참혹하다 하니 장을 가져가라.”고 할 정도였는데, 와서 먹어보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북도는 광천(鑛泉)에서 제조하는 천염(泉鹽)으로 장을 담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집주인에게 염장을 얻어 먹어보니, 맛이 비상하여 오히려 서울서도 드물게 먹던 장맛이었습니다. 이에 유의양은, 장맛은 담기에 달려 있지 소금 맛이 아니었더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유의양은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학문을 등한시한 자신을 반성하라고 선비들에게 일침을 가합니다. 또 장맛이 형편없는 이유가 좋은 자연의 혜택을 입지 못했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위 시구에는 귀양살이하는 필자의 마음가짐도 담겨있는 듯합니다. 자신이 현재 몸담고 발 딛고 있는 곳을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터득한 삶의 지혜임을 알겠습니다.

 

글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