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 이해인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P45
-자서/꽃자리 선물방
하얀 문을 열면 성당의 종탑과 이끼 낀 돌층계와 언덕길이 보이는 곳, 가끔 까치들이 산책 나오는 잔디밭과 채마밭이 보이는 곳, 수녀원을 다녀가는 손님들의 가벼운 발걸음과 웃음소리가 음악으로 들려오는 곳.
나는 이 방을 "꽃자리 선물방" 또는 "누구라도 시인방"이라 부른다. 나는 매일 이 방에서 생각하고 기도하고 글을 쓰고 가끔은 음악을 들으며 사람들을 만난다. 이 방을 다녀가는 이들에게 나는 솔숲에서 주운 솔방울이나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가비들, 몽당연필이나 앙증스런 색종이 상자를 작은 선물로 준다.
내게 말없이 참을성을 가르쳐주는 꽃과 나무들, 수도원 식구들, 독자들, 친지들……. 모두를 다시 소중한 선물로 받아 안으며 나는 오늘도 선물방 주인이 된다. 이 방을 항상 기쁨방, 나눔방의 꽃자리로 만들라는 우리 수녀님들의 목소리를 새겨듣는다.
생각을 잘 익혀야 좋은 시를 쓸 수 있고, 삶을 잘 익혀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숙할 수 있음을 새롭게 알아듣는 가을. 그동안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은 기쁨을 다시 사랑으로 되돌려주고 싶은 나의 열망이 석류 열매처럼 툭 하고 쪼개지는 소리를 듣는 가을.
그동안 내가 빚어놓은 시의 글꽃들을 부족힌 대로나마 곱게 엮어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랜만에 작은 선물로 바칠 수 있는 이 가을. 나는 새삼 행복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 .................................1999년 가을
이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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