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203호
명 칭 : 파주 장릉 (坡州 長陵)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 345,792㎡ 지정일 : 1970.05.26 소 재 지 : 경기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문화재청 관리자 : 파주삼릉관리소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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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무덤이다. 십이지신상이나 구름무늬가 아닌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병풍석이 무덤을 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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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203호 - 파주 장릉(합장묘). 140913.
-조선 16대 왕인 인조(재위 1623∼1649)와 부인 인열왕후(1594∼1635)의 무덤이다.
인조는 광해군 때 인조반정(1623)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나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등 시련이 있었고, 백성의 삶이 어려워지자 강원도에 대동법(1623)을 실시하였다.
장릉은 인조가 왕위에 있을 때 정한 파주 북운천리에 있었으나, 뱀과 전갈이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왕과 왕비가 합장된 무덤 형태이다. 전통적인 십이지신상이나 구름무늬가 아닌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진 병풍석이 무덤을 두르고 있다.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돌로 된 등인 장명등에도 모란무늬와 연꽃무늬가 새겨 있는데 이는 17세기 석물문양의 특징을 보여주는 예라 한다.
이괄의 난
인조는 즉위한 다음해에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이 영변에서 난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로 남천 南遷했다가 난을 진압하고 환도했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세력에 의해 서울을 점령당한 일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인조는 재위 기간 동안 모두 세 차례 서울을 떠나 몽진했다 한다.
정묘호란
이괄의 난 때 반란 주둥 중에 한 명이었던 구성부사 한명련의 아들 윤潤이 반란 실패 후 금나라로 도망쳐 국내의 불안한 정세를 알리자 1627년 후금이 군사 3만여명을 이끌고 쳐들어 오니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이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강화 주장을 받아 들여, 형제의 관계를 약속하는 정묘화약을 맺었다.
병자호란
1636년 4월 국호를 청이라 고친 태종(청태종)은 12월 2일 친히 10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 6일만에 서울에 육박했다. 인조는 청군의 내습이 있자 두 왕자(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비빈종실妃嬪宗室 등을 강화에 피란가게 하고, 인조는 백관과 더불어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물러가 항거했다.
척화파 김상헌 등의 주장이 꺽이고, 최명길 등의 주화론이 채택되어 마침내 인조는 친히 삼전도(지금의 송파: 잠실 롯데월드 놀이기구 기둥 자리라 한다)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에게 예를 드리니, 청태종은 두 왕자(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와 척화론자인 삼학사(조선 중기 충신 윤집(1606∼1637), 오달제(1609∼1637), 홍익한(1586∼1637)를 데리고 철병하고 조정은 환도했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1649년 5월 8일 보령 55세를 일기로 창덕궁 대조전 동침東寢에서 승하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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