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193호
명 칭 : 구리 동구릉 (九里 東九陵) 분 류 : 왕실무덤 수량/면적 : 1,969,675㎡ 지정일 : 1970.05.26 소 재 지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문화재청 관리자 : 동구릉관리소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 보물 1743호 -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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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193호 - 목릉(구리 동구릉). 140511.
-목릉(穆陵)은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와 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선조 33년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인조 8년 1630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인조 10년 1632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고 처음에는 이를 따로이 혜릉(惠陵)이라 이름붙였다. 그러나 세 능역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깝다고 하여 이를 모두 합하여 목릉이라 했다 한다. 조선왕릉 중 세 개의 각각 다른 언덕이 조성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은 목릉이 유일하다. 2011년 12월, 문화재청에서는 목릉의 정자각을 보물 1743호로 지정하였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며, 중종의 일곱번째 아들인 덕흥대원군 초(慵)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년) 11월 11일 한성 인달방에서 태어난 선조의 초명은 균(鈞)이며 뒤에 공(昖)으로 개명했다 한다. 선조는 명종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567년 7월 3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14대 왕으로 즉위했다.
'연려실기술'에 전하는 선조의 어린 시절 얘기 한 토막을 옮겨 보면 이렇다.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치다가 하루는 '너희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려고 한다'며 익선관을 써보라고 했다 한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며 익선관을 머리에 써보았다. 하지만 나이가 제일 어린 선조는 '보통 사람이 어찌 이것을 스겠습니까'라며 어전에 도로 갔다 놓았다 한다.
이렇듯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어질었던 선조는 학문에 정진하며 즉위 초에는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했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며 제자백가서를 읽지 않은 것이 없다고 전한다. 또한 선조는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대거 등용, 명유· 이황· 등을 우대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힘을 다했다 한다.
=========================================▽ 사적 제 193호 - 동구릉 / 목릉 -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의 무덤. 1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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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 193호 - 동구릉 / 목릉 -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인목왕후 김씨의 무덤. 111228.
-조선 제14대 왕 선조(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와 원비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1555~1600),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1584~1632) 세 사람의 무덤이다. 9개의 조선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東九陵, 사적 제193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으로, 왼쪽에 선조, 가운데에 의인왕후, 오른쪽에 인목왕후의 능이 있다.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아랫부분은 12지신상과 구름 문양이 조각된 병풍석으로 감싸여 있다. 봉분 바깥쪽으로 난간석을 비롯하여 혼유석, 망주석 1쌍, 장명등,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문인석·무인석 각 1쌍, 석마(石馬) 2쌍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릉과 인목왕후릉은 비슷한 형식으로,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과 혼유석·망주석·장명등 등의 석물이 있다.
목릉의 능역은 원래 의인왕후 박씨의 왕비릉인 유릉(裕陵)이었다. 목릉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태조의 능인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터가 좋지 않고 물이 찬다 하여 1630년(인조 8) 유릉 자리 즉 현 위치로 옮겼고, 이때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불렀다. 1632년 인목대비의 능을 조성하여 세 개의 능을 이루게 되었다.
-제14대 선조(宣祖, 1552~1608) 1567~1608. 의인왕후(懿仁王后) - 목릉(穆陵)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 전란을 겪은 왕 선조
선조의 왕명 앞에 붙는 타이틀은 여러 개입니다. 조선에서 가장 오랜기간동안 통치한 왕,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두 개의 전란을 겪은 왕, 그리고 조선에서 최초로 후궁소생으로 왕위에 오른 왕등입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제13대 명종이 후손이 없이 돌아가시자(유일한 후손이었던 순회세자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중종의 아홉 번째 아들 덕흥군의 소생으로 16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선왕인 명종의 유교도 없이 왕위에 오른 선조는 정통성에 강한 콤플렉스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위 초 선조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학을 굳건히 세우기 위해 힘썼습니다. 성리학을 나라의 기틀로 세우겠다는 선조의 굳은 의지는 사림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선조의 집권시기에 실제로 나라를 빛낸 큰 학자들이 여럿 배출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황과 이이, 류성룡, 정철, 이덕형은 모두 선조와 동시대를 살다 간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당파싸움은 더욱 격렬해져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 커다란 전쟁을 제대로 무마하지 못한 왕이라는 불명예를 얻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보름 만에 한양으로 무혈입성한 왜군을 피해 백성들을 버리고 한양에서 개성으로 개성에서 평양으로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피난을 떠나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전란은 분연히 떨쳐 일어난 전국각지의 의병들과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동구릉에 있는 목릉에는 바로 두 차례 전란을 겪으신 선조가 모셔져 있는 능입니다. 능을 바라보며 왼쪽에는 선조, 가운데는 의인왕후, 그리고 오른쪽에는 선조의 두 번째 왕비인 인목왕후가 잠들어 있습니다. 목릉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습니다. 두 차례 전란을 겪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선조의 능을 병풍석으로 두름으로 나쁜 살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라 전해집니다.
선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전란이 일어날 것을 조금씩 예언하는 학자들도 있었고 일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지만, 선조는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전란 중에 백성을 버리고 피난하면서도 당파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학자들이 곁에 있고,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을지라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백성을 사랑할 줄 모르는 군주에게는 참혹한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군주는 옳은 말에 귀 기울일 줄 알며 진심으로 나를 버리며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자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 인목왕후 이야기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각기 다른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문과 석물을 배치한 형식의 능을 동원이강릉 형식이라고 부릅니다. 목릉이 바로 이와 같은 형식의 능입니다.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 옆으로 가장 구석진 곳에 인목왕후의 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목왕후는 전쟁이 끝나고 선조가 새롭게 맞아들인 두 번째 왕비였습니다. 선조는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 사이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여 근심이 많았으나 인목왕후에게서 간절히 바라던 아들 영창대군을 얻었습니다. 선조는 본인이 후궁소생이라는 콤플렉스를 늘 안고 있었기 때문에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영창대군이 세 살 때 돌아가시고 임진왜란 당시에 큰 공을 세웠던 광해군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왕위에 올랐습니다.
광해군은 매우 지혜롭고 현명한 군주였으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다고 전해집니다. 광해군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세금을 지역특산물이나 수공업 제품이 아닌 쌀로 통일시켜 토지의 크기에 따라 세금의 양을 달리하는 대동법을 실시하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새로 건국된 후금과의 마찰을 줄이기 위해 중립외교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이 중립외교정책이 광해군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명을 숭상하는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광해군은 정치적인 지지를 받지 못해 늘 불안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급기야 광해군은 6살짜리 영창대군을 역모의 죄를 물어 유배를 보내어 죽게 만들고 능양군의 아우 능창군을 역모죄로 처형하였으며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를 쫓아내 서궁에 가두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광해군은 더욱 지지세력을 잃었고 결국 능양군의 반정으로 쫓겨나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6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인목왕후가 있었습니다. 대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쫓겨나 서궁에 가두어지고 다시 인조반정으로 복귀했던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이제 목릉에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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