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사적 제201호
명 칭 : 서울 태릉과 강릉 (서울 泰陵과 康陵)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 1,661,958㎡
지정일 : 1970.05.26
소 재 지 : 서울 노원구 공능동 223-19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태릉관리소
자료참조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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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릉에서 본 정자각 |
▲ 안내문 |
△ 사적 제201호 - 서울 태릉과 강릉. 111130.
-강릉은 조선 제13대 명종(재위 1545∼1567)과 그의 부인인 인순왕후 심씨(1532∼1575)의 무덤이다. 왕비가 죽은 후 왕의 옆에 무덤을 쓴 쌍릉의 형태를 하고있다. 태릉과 같은 병풍석이 둘러져 있으며 돌로된 등인 장명등은 16세기 복고풍의 특색을 보여준다.
※(태릉·강릉 → 서울 태릉과 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서울 태릉과 강릉 - 강릉(康陵) -종 목 사적 제201호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서울 노원구 공능동 223-19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으며, 만석에 다시 십이간지를 문자로 새겼다. 진입공간에 금천교가 남아 있으며 정자각 왼편 계류에는 보면 둥근 어정(御井)이 있다. 어정이란 왕이 왕래할 때 마실 물을 마시거나 제례시를 위해 판 우물을 말한다.
광릉, 숭릉 등지에서도 이를 볼 수 있으나 강릉의 것이 원형에 가깝다. 강릉의 문석인은 신체 대비 머리의 비례가 크고, 목이 짧게 조각되었다. 복두를 쓰고 관복을 걸친 관료의 차림을 하고 있다. 무석인은 왼편과 오른편의 조각이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오른쪽은 투구가 작고 가슴 전면에 파도 문양이 조각된 반면, 왼쪽 무석인은 팔꿈치에 구름 문양, 등 위와 무릎 부분에 비늘 문양을 새기고 있다. 명종은 유일한 아들이었던 순회세자를 이른 나이에 잃고, 2년 후에는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여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워낙 병약했던 명종은 세자와 모후를 잃은 허탈감에 마음의 병까지 더하여 34세의 나이로 1567년(선조 즉위)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를 명종, 능호를 강릉으로 정한 후 같은 해 9월 22일 태릉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8년 후인 1575년(선조 8) 1월 2일 44세를 맞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였다. 선조는 시호와 존호를 올리고 그 해 4월 28일 명종 왕릉인 강릉에 쌍릉으로 왕비릉을 조성하였다.
강릉(康陵)은 동원쌍릉(同原雙陵)으로 병풍석(屛風石)은 대왕릉(大王陵)과 왕비릉(王妃陵)에 각 12면이 세워졌고 면석(面石)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象)을, 우석(隅石)엔 운채(雲彩)를 새겼으며 만석(滿石)엔 십이지(十二支)의 방위(方位)를 문자(文字)로 새겼으니 태릉(泰陵)과 같다. 난간석(欄干石)은 각 12칸으로 합설(合設)하였으며 상석(床石)은 양릉(兩陵)에 각각 설치(設置)하였고 그 양측(兩側)에 망주석(望柱石) 1쌍이 있으며 양석(羊石)과 호석(虎石)이 각 2쌍 능침(陵寢) 주위(周圍)로 교호 배치(交互 配置)되었고 3면의 곡장(曲墻)이 있다. 위 상계(上階) 아래로 문인석(文人石) 1쌍과 마석(馬石) 1쌍이 상면 설치(相面 設置)되었으며 그 중앙(中央)에 팔각형(八角形) 명등석(明燈石) 1좌가 있으며 중계(中階)를 이루고 있다. 하계(下階)엔 무인석(武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이 있다. 릉원(陵原) 아래에 정자각(丁字閣)이 있으며 정자각 동편(丁字閣 東便)에 비각(碑閣)이 있다. 비면(碑面)은 전서(篆書)로 조선국명종대왕강릉 인순왕후부좌(朝鮮國明宗大王康陵 仁順王后부左)라 썼고 음기(陰記)가 있으며 영조(英祖) 29년(1753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각(丁字閣) 남측(南側)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명종대왕(明宗大王)은 중종(中宗)의 제2자(第2子)로 인종(仁宗)의 이복제(異腹弟)로서 중종(中宗) 29년(1534년) 5월 22일 탄생(誕生)하였으며 휘(諱)가 환이고 자(字)는 대양(對陽)이며 모후(母后)는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이다. 중종(中宗) 34년 (1539년) 12월 21일 경원대군(慶原大君)에 봉(封)하여졌다가 인종(仁宗)이 병세(病勢) 위독(危篤)함에 인종 원년(仁宗 元年)(1545년) 유명(遺命)으로 전위(傳位)받아 이 해 7월 6일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에서 즉위(卽位)하니 춘추(春秋) 12세였다. 명종(明宗)이 유충(幼沖)하여 모후(母后)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8년간 수렴청정(年間 垂簾聽政)을 하였으니 명종 즉위년(明宗 卽位年)(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왕후(王后)의 제 윤원형 일파(弟 尹元衡 一派)인 소윤(小尹)이 집권(執權)하면서 외척(外戚)의 전횡시대(專橫時代)가 되었다.
척신(戚臣)에 의한 전횡(專橫)으로 왕권(王權)은 실추(失墜)되고 외척일족(外戚一族)의 수탈(收奪)로 민생(民生)이 피폐(疲弊)하고 사회(社會)가 불안(不安)한데, 거듭되는 흉년(凶年)으로 민심(民心)이 흉흉(兇兇)하여 전국각처(全國各處)에서 도적(盜賊)이 난립(亂立)하였으니 의도 임거정사건(義盜 林巨正事件)도 그중 하나이다. 모후(母后)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불교(佛敎)의 중흥(中興)이 있었으며 이황(李滉), 이언적(李彦迪) 등 거유석학(巨儒碩學)이 배출(輩出)되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승하(昇遐) 후 명종(明宗)은 척신정치(戚臣政治)의 폐해(幣害)를 척결(剔抉)하고자 인재(人材)를 균용(均用)하고 선정(善政)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뜻을 펴지 못한 채 명종(明宗) 22년(1567년)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景福宮 養心堂)에서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22년이었고 춘추(春秋) 34세였다.
원자 순회세자(元子 順懷世子)가 13세에 요절(夭折)하여 사왕(嗣王)이 없어 중종(中宗)의 제7자(第7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제3자(第3子) 균(鈞)이 승습(承襲)하니 후일(後日)의 선조대왕(宣祖大王)이다. 선조 즉위년(宣祖 卽位年)(1567년) 7월 7일 묘호(廟號)를 명종(明宗)이라 하였고 이 해 9월 22일 양주 노원면 대방동 금산(楊州 蘆原面 大邦洞 金山)의 해좌사향(亥坐巳向)(북북서(北北西)에서 남남동향(南南東向)) 언덕에 예장(禮葬)하고 능호(陵號)를 강릉(康陵)이라 하였다. 명종대왕비(明宗大王妃)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는 본관(本貫)이 청송(靑松)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 청릉부원군 심강(靑陵府院君 沈鋼)의 여(女)로서 중종(中宗) 27년(1532년) 5월 25일 탄생(誕生)하였으며 명종 즉위년(明宗 卽位年)(1545년)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었다.
명종(明宗) 22년(1567년) 6월 명종(明宗)이 승하(昇遐)하고 선조(宣祖)가 즉위(卽位)하였으나 유충(幼沖)하여 왕비(王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으나 이듬해인 선조 원년(宣祖 元年)(1568년) 7월 철렴(撤簾)하였다. 선조(宣祖) 8년(1575년) 1월 2일 창경궁 통명전(昌慶宮 通名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춘추 44세(春秋 44歲)였다. 이 해 1월 11일 시호(諡號)를 인순(仁順)이라 하였고 4월 28일 강릉 동편(康陵 東便)에 동원이봉(同原異封)으로 예장(禮葬)하였다. 소생(所生)으로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있었으나 명종(明宗) 18년(1563년) 13세의 나이로 요절(夭折)하였다.
▶명종의 생애 및 일화 명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한 탓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을사사화, 양재역 벽서 사건 등을 계기로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과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권은 실추되고 외척 일족의 수탈로 민생이 피폐하여 사회가 불안하였으며, 거듭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명종이 20세가 되던 해인 1553년(명종 8)에는 문정왕후가 8년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을 하게 되었다. 명종은 외척을 견제하고 고른 인재 등용을 하려 했으나, 당쟁과 파당의 문란한 정치를 막을 길이 없었다. 게다가 친정이라고 해도, 큰일은 일일이 문정왕후의 지시를 받아 처리해야 했으므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 와중에 양주 출신 백정 임꺽정이 의적 행각을 벌였는데, 『명종실록』의 사신은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평할 만큼 조정은 어지러운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명종은 이러한 가운데 1567년(명종 14)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3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을 홍길동,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으로 꼽았다. 이중 임꺽정은 16세기 중반 명종 재위 시에 함경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도둑으로 양주의 백정 출신이다. 자신의 천한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둑질을 일삼다가 훔친 곡식 등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줘 의적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명종 대에 정치적인 혼란과 흉년이 이어지는데다, 관리들의 타락과 부패가 심해져 민심이 흉흉하자, 세력을 모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들을 빈민에게 나눠주며 의적 행각을 벌였다.
1559년(명종 14)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는 등 과감하게 행동반경을 넓혔다가 참모와 가족들이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임꺽정 일당에 대한 다음과 같은 사신의 평이 『명종실록』에 실려 있다. 국가에 선정(善政)이 없고 교화가 밝혀지지 않아 재상들의 횡포와 수령들의 포학이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고 기름과 피를 말려 손발을 둘 곳이 없고 호소할 곳도 없으며 기한(飢寒)이 절박하여 하루도 살기가 어려워 잠시라도 연명(延命)하려고 도적이 되었다면, 도적이 된 원인은 정치를 잘못하였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태릉(泰陵)과 강릉(康陵) 중간지역(中間地域)엔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에서 운영(運營)하는 태릉선수촌(泰陵選手村)이 있다. 이 체육시설(體育施設)은 1965년경에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에서 개촌(開村)하여 올림픽 등 각종 국제경기대회(國際競技大會)에 대비(對備)하여 우수선수(優秀選手) 양성(養成)을 위한 훈련시설(訓練施設)로 활용(活用)되어오고 있으며 체육(體育)의 진흥(振興) 및 체육인(體育人)의 요람(搖籃)으로서 국제대회(國際大會)에서 국위(國威)를 선양(宣楊)함에 크게 공헌(貢獻)한 바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설(施設) 또한 위의 사격시설(射擊施設)과 같이 문화유적보존(文化遺蹟保存)에 영향(影響)을 미치고 있다 할 것이며 능역(陵域)과 배치관계(背馳關係)에 있는 시설(施設)은 정비(整備)되어 원상(原狀)이 회복(回復)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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